K와 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0일간의 여행이 리셋되고 다시 처음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파리에서의 두 번째 숙소는 파리 5구에 있었다. 우리는 리옹역에서 숙소까지 우버를 이용했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메트로를 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니스에서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마지막으로 먹은 햄버거가 체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기차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이 상태에서 메트로를 타는 건 무리였다.
리옹 역에서 나와 K는 우버를 호출했다. 다행히 목적지까지 찍어보니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 나왔다. 숙소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우버 드라이버는 파리에 정착한 이민자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아랍인의 인상이 짙게 느껴졌다. 모로코계 프랑스인인 ‘살림’이 떠올랐다.
살림도 프랑스에 정착한 이주민 2세였다. 살림과 나는 영국 어학연수 시절 만났다. 어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살림은 그와 같은 반이었다. 둘은 어학원에서도 가장 낮은 레벨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 반은 유독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았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자 그들은 손짓과 몸짓, 발짓으로 소통했고 그러면서 끈끈한 우애가 생겼다. 살림의 가족들은 프랑스에 살았다. 부모님은 모로코인이었지만, 프랑스에 정착한 지 꽤 됐다고 했다. 그를 보면서 프랑스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우버 드라이버는 빠르고 안전하게 우리를 목적지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호텔 앞에 캐리어를 내려주고는 쿨하게 사라졌다. 파리에서의 두 번째 숙소는 부티크 호텔 같은 곳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라운지와 1층에 있는 정원 카페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물론, 2인 이상 탑승할 순 없었지만.
이번에도 우리는 3~4층 되는 곳의 방을 배정받았다. 첫 번째 숙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두 번째 숙소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랜 시간 기차와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상쾌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건너편 건물에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나는 “엄마야!”하고 소리쳤다. 내 목소리에 그도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나와 K도 얼떨결에 그에게 인사했다. 그의 행동은 친절했지만, 앞으로 창문을 열 때는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파리에서의 첫 일정은 센 강에서 바토무슈를 타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지에서 유람선을 타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여행하는 곳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아닌 이상) 하지만 K가 센 강에서 바토무슈를 탈 기를 강력히 원했고, 나는 조용히 그의 뜻에 따랐다.
숙소에 도착한 이후로도 컨디션이 썩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K와 나는 미리 예약된 바토무슈를 타기 위해 파리 1구 쪽으로 향했다. 다만, 외출하기 전에 우리는 단단히 외출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가 잠깐 파리를 떠나 있는 사이 파리의 날씨는 급격히 나빠졌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우중충했고,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니스의 축복받은 날씨 속에 있다가 파리로 돌아오니 날씨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졌다. 여름옷밖에 준비해오지 않아 우리는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K와 나는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두껍고 긴 옷을 찾아 입었다. 그러나 그 옷만으로는 추위가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지난번에 마크스앤스펜서에 산 로브를 꺼내 들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을 때 꺼내 입을 요량으로.
바토무슈 선착장에 들어서자 툭 툭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유람선을 타기엔 정말 최악의 날씨였다. 하지만 우리는 예매한 표를 버릴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은 센강의 상하류를 왕복하며 주요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불어로, 그리고 또 영어로. 처음엔 유람선에서 들려주는 설명이 어느 정도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유람선이 선체를 돌려 다시 출발한 곳으로 이동할 때 즈음 빗방울을 더 굵어졌고, 몰아치는 비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부터는 그저 빨리 이 유람선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여행을 이어가기엔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에 찬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정을 접고 바로 숙소로 향하기로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억지로 다른 일정을 소화했다면, 남은 여행 전체를 망쳐버렸을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K와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그렇게 30분을 쉬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열이 나고 여기저기에 알레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멀리 여행까지 와서 아플 일인가 싶었다. 다행히 K에게 상비약이 있었다. (나는 진통제 외에 다른 약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현지에서 생긴 병은 현지 약으로 다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 K는 알레르기를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있는 알약 하나를 건넸다.
알약을 삼키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럴 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는 편이 나았다. 알레르기 약에 수면제 성분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날은 유독 잠이 잘 왔다. 아마 니스에서 파리까지 오느라 피곤해서 그랬으리…. K는 나를 배려해 스탠드 하나만 남겨두고 방 안의 불을 모두 껐다. 덕분에 나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