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일찍 디즈니랜드에서 돌아온 탓에 오후 시간이 통째로 비었다. K와 나는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쇼핑과 휴식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의 쇼핑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시작해 마레 지구로 이어졌다. 샹젤리제 거리에는 명품관 외에도 다양한 브랜드의 상점이 모여있다. 우리는 국내에 입점되지 않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아이쇼핑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반가운 브랜드가 눈에 들어왔다. 마크스앤스펜서(M&S, Marks & Spencer)였다.
5년 전에는 이 자리에 마크스앤스펜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샹젤리제 거리 한가운데 2층짜리 마크스앤스펜서가 들어서 있었다. 영국에 살 때 참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여행지에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매장 입구로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역시 마크스앤스펜서에는 없는 게 없었다. 2층 이너웨어 코너에서 나는 마음에 드는 로브 하나를 발견했다. 작고 빨간 꽃이 가득 박혀있는 지극히 유럽스러운 패턴의 로브였다. 마침 로브가 필요했던 나는 얼른 그것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계산을 하고, 매장을 나가려고 하는데 K가 보이지 않았다. 쇼핑에 열중하다 서로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K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의 위치를 파악했다.
“어디야? 옷 사고 나오려고 보니 없네?”
“나? 디즈니스토어!”
마크스앤스펜서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디즈니스토어가 있었다. 디즈니 덕후인 K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디즈니랜드를 다녀온 직후 심지어 디즈니랜드에 있는 디즈니스토어를 탈탈 털어온 직후에 바로 디즈니스토어를 또 갈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K를 얕봤다.) 어찌 됐든 K와 나는 디즈니스토어에서 재회했다. 디즈니스토어에는 인형을 사달라고 엄마 아빠에게 떼쓰는 어린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K는 그 속에서 아기코끼리 점보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점보를 향해 “얘, 너 언니랑 한국 같이 갈래?”라고 물으면서.
결국 아기 코끼리 점보 인형은 우리와 함께 여행하게 됐다. (꽤 커다란 몸집의 점보는 웬만한 가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외출한 사이 호텔 방을 지키고 있었다. 종종 숙소를 옮겨야 할 때는 에코백에 들어갔다. 그런데 점보의 커다란 몸집은 에코백 안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고, 점보의 귀나 코 일부가 에코백 밖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점보와 함께 우리는 마레지구로 이동해 쇼핑을 이어갔다. 파리에 오면 꼭 들러야 한다는 (대체 누가 정한 건지 모를) 편집샵 ‘메르시(Merci)’에서 시작해 A.P.C 매장을 순차적으로 돌았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사고 싶은 것을 산 다음 다시 만나기로 했다.
라이프스타일 제품에 관심이 많은 난 ‘플럭스(FLUEX)’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메르시에 보다 유명한 편집샵은 아니지만, 사실 나의 취향은 메르시보단 플럭스였다. 갖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가산을 탕진할 뻔했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한 끝에 난 종이로 된 화병 덮개와 티코스터 등을 샀다. 긴 삼각뿔로 된 파스텔 톤의 양초를 너무 사고 싶었지만, 왠지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양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파리에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히 양초를 포기했다. (다음에 간다면 꼭 뽁뽁이를 챙겨가 그 양초를 사 오리!)
가열찬 쇼핑이 마치고 K와 나는 퐁피두센터 앞에서 만났다. 나만큼이나 K는 많은 것을 산 모양이었다. (쇼핑백의 개수는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쇼핑을 했는지 보여줬다.) 우리는 퐁피두센터 앞 팅겔리의 조각 분수가 잘 보이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K와 나는 가지 라자냐와 파스타 하나를 시켰다. 가지 라자냐는 역시 고기가 들어간 것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오일로 색다른 맛을 냈고 꽤 맛이 좋았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고 K와 나는 각자 사 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늘여놓았다. 서로가 뭘 샀는지 공유하는 것은 쇼핑의 또 다른 재미였다. 우리는 식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퐁피두 센터에서 조금 더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마레지구는 어느 정도 돌았지만, 퐁피두 센터 앞은 자세히 못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퐁피두 센터 주변을 탐색했다. 그때 내 눈에 전시 포스터가 하나 들어왔다. ‘데이비드 호크니 전’
퐁피두 센터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호크니 전시를 보러 왔는지 매표소의 줄이 꽤 길었다. 마음속으로 “헐, 나도 보고 싶어!”라고 소리쳤지만, 차마 또 전시를 보러 가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면 프랑스나 영국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전시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전시 종료까지 아직 며칠 더 남아있었다. 나는 니스에 갔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면 자유시간에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센 강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날, 센 강에서의 휴식이 너무 좋기도 했고 지금 센 강에서는 파리 플라주를 즐길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 어디선가 파리 플라주에 대한 짤막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여름철, 센 강 주변에 인공해변을 만들어 파리 시민들이 마음껏 일광욕을 즐길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도심 속 인공해변이라니,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구글에서 파리 플라주 장소와 일정을 검색했다. 다행히 우리와 인접한 곳에 파리 플라주 장소가 몇 군데 있었고 우리는 파리지앵처럼 파리 플라주를 즐기기 위해 센 강으로 향했다.
센 강에 도착하자 파리 플라주라고 쓰여 있는 파란색 깃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깃발을 강바람에 시원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런데 인공해변은 어디 있지? K와 나는 인공해변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상상한 인공해변은 새하얀 모래가 가득 깔려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 흙바닥이나 잔디 바닥의 해변이었다. 간혹 있는 모래 해변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얼른 선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꿰찼다.
상상한 인공해변이 아니어서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파리 플라주는 파리 시민들에게 굉장히 인기 있는 장소인 것 같았다. 곳곳에 모래사장과 선베드, 안락의자 등에 사람들이 가득 찼으니 말이다. 우리는 일찍 온 사람들에게 파리 플라주의 핫한 장소들을 모두 빼앗겼다. 한번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전세라도 낸 양, 그 자리를 쉽게 비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K와 나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돌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파리 플라주를 즐길 순 없었지만,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K와 나는 한국에서부터 공수해 온 손 선풍기를 틀고 그늘 아래에서 우리만의 파리 플라주를 즐겼다. “우리가 언제 또 도심 속에서 수영복 입고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겠어!”라고 말하며.
여행은 늘 긍정의 힘을 심어주는 것 같다. 오늘처럼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