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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Sep 13. 2019

오늘도 이 도시는 아름답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K와 나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버렸다. 한여름에 30분 넘게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리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오면 좋으련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누운 지 십여 분 만에 잠이 든 K와 달리, 나는 30분 넘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낮잠 자길 포기했다. 누워서 잡생각을 하느니 그냥 일어나버리는 편이 속 편했다. 혹 K의 잠이 깰까,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중정과 달리 테라스는 호텔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중정. 나는 아무도 없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직도 수백 페이지가 남은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십 여분 동안에는 소설에 빠져드는 듯했지만, 역시 집중이 되지 않았다. 피곤해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호텔 테라스와 중정을 보고 숙소를 선택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인데, 왜 중정에는 늘 사람이 없을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중정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간혹 호텔 직원들이 지나가다 내 곁에 잠시 머물다 가긴 했지만, 정작 투숙객들은 중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정에 30분 넘게 앉아있으니 투숙객들이 그동안 이곳을 외면한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범인은 비둘기였다.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면서 여기저기 똥을 쌌고, 중정에 잘못 앉아 있다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둘기 똥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테이블 주변에는 하얀색 비둘기 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역시…. 사람들의 행동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비둘기의 존재를 인식한 다음부터는 혹시 비둘기 똥을 맞는 건 아닌지 불안해 더 이상 중정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호텔 프런트에 책을 맡기고 주변 산책에 나섰다. 호텔부터 메트로 역까지 여행하며 늘 지나쳤던 익숙한 거리 대신,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성곽의 외벽 같은 돌담이 나왔고, 주택가와 작은 상점들이 보였다. 유명 관광지와 명품관이 즐비한 동네라 필시 호텔 주변은 부자 동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소박한 가게들이 많았고, 화려하게만 보였던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겼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K와 나는 첫날 실패한 스테이크 맛집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한 번 갔던 길이라 우리는 막힘 없이 가게를 찾아갔다. 아직 저녁 장사를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스테이크 가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첫날보다는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K와 나는 “조금 더 서둘러올걸”이라고 생각하며 대기 줄을 섰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줄 서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난 나름대로 지루하지 않게 줄 서는 방법을 터득했다. 함께 줄 서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한국인 여행자들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유럽 여행을 온 것처럼 보이는 대학생들이었다. 따로따로 온 두 무리의 대학생들은 우연히 스테이크 집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한국에서부터 알던 친구인데, 서로 유럽 여행 중인 걸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여기서 딱 마주쳤다고 했다. 그동안의 여행 경비를 아껴서 마지막 날에 스테이크를 먹으러 왔다는 대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니, 5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이곳에 있는 대학생들이 나보다는 더 부유한 여행을 한 것 같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내 시선을 끈 건, 유모차를 끌고 온 아기 아빠였다. 태어난 지 2~3개월쯤 돼 보이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이 아빠는 홀로 줄을 서 있었다. 유모차를 앞뒤로 밀며 아이를 잠재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 엄마와 네다섯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첫째 아들은 근처 카페에 앉아 있으라고 한 뒤, 나 홀로 맛집 줄을 서는 가장의 모습은 조금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누구보다도 책임감 넘쳐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꼭 맛있는 스테이크를 맛보게 하리라는 그런 책임감.


마지막으로 눈길이 간 사람은 미국인 여행객들이었다. 늦게 온 사람들을 줄 세우고, 가게 직원의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는 것을 보고 처음엔 스테이크 집 직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스테이크를 먹으러 온 관광객일 뿐이었다. 역시 미국인의 오지랖과 행동력은 알아줘야 한다.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스테이크 가게는 2개 층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그 안은 이미 가득 차 있었고, 우리에게 허락된 자리는 야외에 있는 2인석 테이블이었다.


이곳의 메뉴는 단 하나, 스테이크였다. K와 나는 와인 2잔과 함께 스테이크 두 접시를 시켰다. 단일 메뉴이기 때문에 굽기 정도만 말하면 됐다. 어떤 부위로 주문할 건지, 사이드 메뉴는 무엇으로 할 건지, 소스는 어떤 게 좋은지 말하지 않아도 돼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주문한 스테이크 빛의 속도로 서빙되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거 주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곳 시스템은 꼭 패스트푸드점 같았다. 초벌 된 스테이크를 홀에서 계속 구워냈고, 구워진 스테이크 서빙 직원들에게 전달됐다. 몇몇이 계속 고기를 굽고, 몇몇이 접시에 그걸 담아가는…. 그래서인지 스테이크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 회전이 빨랐다.


스테이크의 맛은 기대에 못 미쳤다. 소스가 짠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고기에서 짠맛이 났는지 모르겠다. K와 나는 고기 몇 점을 집어 먹다가 칩스로 손을 옮겼다. 우리 입에는 너무 짜 고기를 다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칩스로라도 배를 채울 요량으로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을 집중 공략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숙소에 들렀다. 오늘 밤 에펠탑에서는 프랑스혁명 기념일을 축하하는 조명쇼가 있을 예정이었다. K와 나는 에펠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숙소 근처 트로카데로 정원(Trocadéro Gardens)에서 조명쇼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해가 지나려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밖에서 무한 대기하느니, 숙소에서 편하게 쉬다 오는 것을 택했다.


조명쇼 시간에 맞춰 우리는 숙소를 나섰다. 깜깜한 밤이었지만, 파리 시내는 활기를 띠었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조명쇼를 보러 가는 것 같았다. 트로카데로 정원은 초행길이었지만, 우리는 구글맵 지도를 보지 않았다. 그저 에펠탑이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걸을 뿐. 정원에 도착하니 구름 떼 같은 인파가 보였다. 파리의 관광객이란 관광객은 전부 여기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니만큼 경비도 삼엄했다. 파리 경찰들이 일일이 가방 검사를 했고 몇몇 곳에는 통행을 저지하는 펜스도 세워졌다.


우리는 많은 인파를 뚫고 그나마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았다. 여기저기 안전펜스가 세워진 탓에 에펠탑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오페라하우스로 추정되는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에펠탑을 볼 수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곧이어 화려한 조명쇼가 시작되었고 한동안 우리는 넋을 놓고 에펠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프랑스 국기 색으로 변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을 수놓는 폭죽 사이로 언뜻언뜻 실루엣을 내비치는 파리의 상징을.


우리는 작은 환호성과 함께 바라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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