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째 날과 둘째 날은 K와 내가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셋째 날부터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움직였다.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는 파리 1구. 그곳에서 K와 나는 하고 싶은 일이 극명하게 갈렸다. 난 미술관에 가고자 했고, K는 파리 1구의 핫하다는 카페를 투어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떨어져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K와 나는 정확히 2시간 뒤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로열 궁 정원에서 헤어졌다. 나의 목적지는 로열 궁 정원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5년 전 파리를 방문했을 때는 주요 관광지만 들리느라 생략했던 장소다. (5년 전에는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을 들렀었다.) 파리에는 오르세, 오랑주리 말고도 많은 미술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기로 한 건 지인들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어릴 적 미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유치원에 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미술학원을 다녔고, 미술을 전공한 언니 덕분에 일찍부터 전시를 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고, 업으로 삼은 사람들과 친해졌다. 나에게 오랑주리 미술관을 추천한 것도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인들이었다.
“넌 인상주의 작품을 좋아하니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보는 것도 좋을 거야.”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한 지인이 말했다.
그리고 미술작가로 활동하는 또 다른 지인이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는 미술사조로 보면 인상주의, 특히 인물이 등장하는 풍경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모네, 세잔느,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작가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은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K를 뒤로 한 채 로열 궁 정원에서 튈르리 공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혼자 여행하던 때처럼 구글 맵으로 가는 길을 확인한 다음,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 외벽을 지날 때 즈음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K가 여행 커뮤니티에서 봤다던 소매치기가 나타난 것이다. 혼자 여행하던 관광객에게 한 여자가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곤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서명을 좀 해달라고했다. 관광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관광객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대는 사이 주변에 있던 2~3명의 여자가 그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는 4명의 여자에게 포위당했다.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 이렇게 순식간에 소매치기를 당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한 남자가 관광객을 포위한 여자들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큰 소리로 그녀들에게 소리쳤다. 불어로 말하는 탓에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알 순 없지만, 주변 사람들을 향해 “이 사람들한테 서명해 주지 마세요! 소매치기입니다!”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큰 소리가 나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머릿수로 보면 4 대 1. 여자들이 우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시선이 쏠린 탓인지 여자들은 남자를 흘겨보며 몇 마디 하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시선을 건넨, 군중의 힘이었다. 관광객을 둘러쌓던 여자들이 떠나자 걸음을 멈췄던 사람들도 다시 자기의 목적지로 걸음을 서둘렀다. 마치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듯했다. 낯선 곳에서 곤경에 처했던 관광객은 자신을 구해준 남성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남자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겸손한 표정을 지었고, 관광객을 향해 영어로 말했다.
“파리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해.
휴대전화와 지갑을 절대 손에 들고 다니지 마!”
참 친절한 프랑스인이었다.
소매치기 소동을 보느라 잠시 걸음을 멈췄던 나도 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조금 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튈르리 공원을 가로질러 갔다. 회전 그네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튈르리 공원 후문에서 키 큰 나무와 푸른 잔디가 있는 공원 중심부로, 또 커다란 분수가 있는 공원 정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튈르리 공원에 대해 아주 짧게 묘사했지만, 튈르리 공원은 다채로운 장소였다. 걸음을 뗄 때마다 다른 분위기의 정원이 나타났고, 파란 하늘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놀이공원의 조명은 비현실적이 느낌까지 주었다.)
튈르리 공원의 가장 큰 분수에서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니 오랑주리 미술관 건물이 보였다. 루브르 박물관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관광객들이 굉장히 많았다. 입장을 위해 줄을 서야 할 만큼.
나는 일본인 관광객 뒤로 줄을 섰다.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가방 검사를 하는 곳까지 다다랐다. 가방 검사를 하는 미술관 직원은 통통한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검색대를 통과하는 방문객들을 향해 짤막한 인사를 건넸는데, 중국인에게는 중국어로, 일본인에게는 일본어로 인사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그녀가 일본어 인사를 건넬 줄 알았다. (누군가 나에게 일본어로 말을 거는 일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영국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미술관에서 근무하며 그녀는 옷차림이나 생김새만으로 동양인을 구분하는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서양인들의 눈엔 동양인들이 다 비슷해 보인다고 하던데, 모든 동양인을 구분해내는 그녀에게서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낯선 서양인의 입에서 나온 내 나라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근대 회화 작품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이곳의 자랑이라는 모네의 ‘수련’은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다웠으며, 붓 터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했다.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하는 어글리 투어리스트들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
미술 전시와 꼭 맞는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나는 전시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리고 한 작품 앞에 섰다. 나를 프랑스 파리로 다시 불러들인 그 작품. 외젠 부댕의 트루빌의 해변이었다. 나의 게으름 때문에 이번 파리 여행에서는 트루빌을 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난 또 운명처럼 이곳에서 트루빌의 해변을 다시 보게 됐고,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비록 트루빌의 해변은 가지 못했지만…. 이걸로도 충분해”라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