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시리얼로 시작한 여행 셋째 날. 우리는 관광객답게 파리하면 떠오르는 주요 여행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주요 여행지를 가기 전, K와 나는 파리의 한 벼룩시장에 들렀다. 볼거리 가득하다는 블로거들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벼룩시장은 소규모였고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들도 별로 없었다. 가격도 벼룩시장이라고 하기에는 꽤 비싼 편이었다. 파리의 벼룩시장을 극찬한 그 블로거는 영국의 벼룩시장을 안 가본 게 틀림없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작해 튈르리 공원과 콩코드 광장, 그랑팔레와 센강을 지나는 코스였다. K와 나는 미니 백에 지갑과 휴대전화 등 최소한의 물건만 챙겨 길을 나섰다.
파리의 주요 관광지에는 소매치기가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K는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국내의 한 여행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그곳에서 K는 파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다수의 피해 사례를 보았는데, 그게 너무 걱정돼 한국에서부터 휴대전화와 손목을 이어주는 손목 스트랩 2개를 챙겨 왔다.
5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소매치기가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낯선 이가 말을 걸어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5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변한 듯했다. 여행 커뮤니티에 올라온 생생한 소매치기 당한 썰들은 이 도시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고, 우리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휴대전화에 건 손목 스트랩을 꼭 쥐고 다녔다. (여행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소매치기 유형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설문조사나 서명을 해달라고 하면서 한 사람을 에워싸고 지갑을 슬쩍해가는 사람부터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대놓고 낚아채 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K와 나는 메트로를 타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사실 우리에게 루브르 박물관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5년 전에 루브르 박물관을 한번 쭉 돌았고, K는 여행지에서 박물관을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인증사진만을 남기고, 박물관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향하는 길은 K가 안내했다. K가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5년 전 Y와 함께 왔던 곳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조금 걸으면 로열 궁(Domaine National du Palais-Royal)이 있다. 그 앞에는 높이가 다른 원통 조형물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년 전 Y와 나는 그곳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 당시 Y와 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한 뒤, 점심 먹을 레스토랑을 찾다가 우연히 로열 정원에 들렸다.) 데자뷔처럼 K는 나에게 원통에 올라가 사진 찍을 것을 제안했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게 되다니…. 내 얼굴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진을 찍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5년 전에도, 지금도 여기 올 운명이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K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나는 5년 전과 똑같은 포즈로 파리 여행 인증샷을 남겼다.
내 기억대로라면, 로열 궁을 쭉 걸어가면 예쁜 정원이 하나 나올 터였다. 5년 전에 Y와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어갔던 그 정원이다. 한 번 가봤을 뿐인데,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5년 전 나는 꽤 인상적인 파리 여행을 한 모양이다.
만족스러운 인증샷을 찍은 K는 나를 기억 속 그 정원으로 인도했다. 로열 궁 정원(Jadin du Palais Royal)은 내 기억 속 모습과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네모 반듯이 가꿔진 정원수와 원근감이 느껴지는 키 큰 나무들까지 이곳의 풍경은 신기할 정도로 내 기억과 일치했다.
K가 가고 싶다던 카페는 그 정원 안에 있었다. 아주 작은 카페였는데, 이곳 역시 유명한 곳인지 가게 안은 물론, 테라스까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서 메뉴를 살폈다. 이곳은 특히 커피와 마들렌, 쿠키가 유명한 곳인 것 같았다.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는 동안, 테라스 좌석 하나가 비었다. 나는 아직 메뉴를 결정하지 못한 K에게 주문을 부탁하고, 얼른 테라스 좌석으로 가 자리를 선점했다. 훌륭한 콤비 플레이였다.
나는 초록색 철제 테이블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뚱뚱한 비둘기들이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먹겠다고 내 다리 밑으로 달려드는 것을 제외하곤 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커다란 분수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평일 아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조금 뒤 K는 쟁반 가득 커피와 디저트를 들고 나타났다. K는 “레몬 마들렌이랑 쿠키도 주문했어!”라고 말하며, 주문한 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역시 K가 시그니처 메뉴를 놓칠 리 없었다. 잠시 K를 위한 디저트 인증샷 타임을 가진 뒤, 우리는 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맛이 조금 심심한 듯했지만, 이내 레몬 맛이 입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나는 속으로 “이 집 마들렌 참 잘하네”라고 생각했다. 과하지 않은 맛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티 타임도 잠시, K는 휴대폰을 꺼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남자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우리가 여행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될 것 같다고 말하던 K였는데…. 어느새 구남친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동안 난 뭘 했나 모르겠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 달달한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를 비켜 분수대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는 이미 몇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젊은 여자 무리, 그리고 교양 있어 보이는 노인들. 나이와 성별, 생김새는 모두 달랐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이 장소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빈자리를 찾아, 한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들어온 한 남자가 있었다.
분수대 위에 두 다리를 올린 뒤, 올린 두 다리를 지지대 삼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 깔끔한 폴로티 차림의 그 남자는 관광객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책 읽는 남자의 모습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다니…. 실례인 걸 알지만, 난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남몰래 그 사람의 행동을 관찰했다.
포마드로 단정한 게 넘긴 헤어, 폴로 티와 면바지로 완성한 패션, 그리고 에코백에 담긴 사과 두 알. 밖으로 보이는 그 남자의 모습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때 난 처음 알았다. 나의 이상형에 대해. 평소 이상형이 뭐냐고 묻는 친구들의 물음에 난 “글쎄….”라고 말을 흐리고 말았다. 연애할 때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꼭 내 이상형은 아니었기에 정확히 이상형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이제는 내 이상형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상형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진짜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드디어 찾았다, 내 이상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