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 갤러리는 개선문에서 도보로 25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개선문에서 출발해 갤러리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화창한 날씨에 왠지 조금 걷고 싶었다. 평소라면 절대 걷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행 중이니까.
K와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갤러리로 향하는 길, 큰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푸조 자동차 건물이 보였다.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지만, 푸조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알렉스는 나와 나이 차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의 오빠 역할을 자처했다. (알렉스에게는 대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볼 때면 자기 여동생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스피킹이 잘되지 않아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 늘 응원의 말을 건넸고, 홈스테이 가정과 불화가 있었을 때는 따스하게 안아주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알렉스는 언젠가 한 번 나에게 자기 회사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다. 어학원 수업 중 짝꿍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알렉스는 푸조 자동차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늘 백팩을 짧게 고쳐 매고 다녔기에 알렉스가 직장인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학생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름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이었고, 직장과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났다.
맨체스터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급히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나와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는 SNS도 하지 않았고 달리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는 파리에서, 그가 일한다는 푸조 자동차 건물을 보고 있자니 “파리에 있는 동안 우연히 알렉스를 만나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친구를 떠올리며 걷기를 십여 분. 우리는 큰 대로변을 지나 숲에 들어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블로뉴 숲(Bois de Boulogne). 대로변에서 몇 분 걸어왔을 뿐인데,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블로뉴 숲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는데, 숲과 놀이공원, 식물원 등이 있었다.
루이비통 갤러리는 블로뉴 숲 한쪽 끄트머리에 위치해있다. K와 나는 벨리브(파리의 공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사실 파리 여행을 오기 바로 직전, 나는 대학원에서 벨리브를 비롯한 전 세계 공유 자전거에 대해 배웠다. 친애하는 나의 교수님은 벨리브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들려주셨고, 그 덕분에 파리에서 벨리브를 볼 때마다 대학원 수업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생 때 이후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자전거를 탄다는 게 나는 덜컥 겁이 났고, 그래서 벨리브를 이용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뒀다.)
숲길을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방이 초록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초록을 바라보는 내 눈과 마음은 무척 편안했다. 그리고 길을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나뭇잎과 잔가지들의 화음도 좋았다.
숲길의 매력에 홀딱 빠져 걷다 보니 저 멀리 현대식 건물이 들어왔다. 드디어 루이비통 갤러리에 도착한 것이다. ‘모더니즘’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루이비통 갤러리의 외관은 자연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특히 건물 안팎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연결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는데, 내가 본 것 중 가장 우아한 물줄기가 아닐 수 없었다.
K와 나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해 갤러리로 들어섰다. 갤러리에서도 가방 검사가 이루어졌다. 컨베이어 벨트에 가방을 넣어 보내는 게 마치 공항 검색대를 연상케 했다. 위험한 물건은 소지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당연히 무사통과될 줄 알았다. 하지만 와인이 문제였다. 갤러리 직원은 안타깝게도 와인은 갤러리 안으로 반입할 수 없다고 했다. “갤러리 안에서 마실 것도 아닌데 엄청 깐깐하네….”라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우리는 고분고분하게 몇 가지 짐을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비통 갤러리의 전시는 대부분이 현대미술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버려진 물건들로 만든 아프리카풍의 조형물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얼굴을 주제로 한 초상화였다. 갤러리 옥상에는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옥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옥상에 올라가니 입체적이고 현대적인 갤러리 건물이 더 잘 눈에 들어왔다.
두어 시간을 갤러리에서 보낸 다음, K와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루이비통 갤러리 바로 옆에 있는 쪽문을 이용하면 조그마한 놀이공원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 피크닉 매트를 펴고 앉았다. 계획대로라면 와인 피크닉이 되어야 했지만, 우리가 마실 와인은 물품보관소에 있었다. K와 나는 아쉬운 대로 라뒤레에서 산 케이크와 마카롱을 꺼냈고, 디저트를 먹으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신발을 벗고, 매트 위에서 다리를 쭉 폈다. 숲길을 걸을 때는 잘 몰랐는데, 다리를 쭉 펴고 앉으니 피로감이 느껴졌다. K와 나는 마카롱을 반씩 잘라 음미했다. 레몬 맛 마카롱은 카페에서 만난 미국인의 말대로 정말 상큼하고 맛있었다. 디저트를 먹으며 나는 가방에 넣어뒀던 책을 꺼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 그 무거운 걸 난 여기까지 들고 왔다. 쉬는 동안 나는 책을 읽었고, K는 돌아다니면서 공원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이 여유로움이 좋았다.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책장을 넘기는 바람도,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파리지앵의 여유로운 삶의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