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린 프랑스혁명 기념일 행사가 끝났다.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세워뒀던 안전펜스는 하나둘 철거되었고, 구름같이 모였던 인파도 슬슬 해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산하는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K와 나는 조금 일찍 샹젤리제 거리를 나서, K가 미리 알아본 카페로 향했다. (K는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핫하다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을 알아봤다. 그 덕분에 나는 메뉴 선정, 레스토랑 선정 등의 고민 없이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었더니 마치 유리 온실을 떠오르게 하는 초록색 간판의 카페가 보였다. K가 알아본 카페는 이미 마카롱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곳이었다. 맛집답게 가게 안팎은 사람들로 붐볐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차례차례 줄을 서 들어가야 했는데, 마카롱을 사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대기 순서를 기다리며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진열장에는 이 집의 시그니처인 마카롱이 색깔별로 줄지어 있었다. 또 엔틱한 분위기의 플로어에는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었고, 그곳은 하하 호호 웃으며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마카롱의 종류가 너무 많아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레몬과 라즈베리 맛 마카롱을 2개를 주문했다. 그리고 산딸기로 장식된 미니 케이크 한 조각을 구매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제는 배를 채울 시간이었다. 카페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바(bar)처럼 생긴 공간으로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한자리를 잡아 무리에 합류했다.
파리에서의 첫 만찬을 너무나 많이 남겼던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양이 적은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카페에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크로와상 하나와 오믈렛만 시켰다. 브런치와 곁들일 음료로 나는 라떼를, K는 이름 모를 티를 주문했다. (K는 진정한 카페 러버이지만, 정작 커피 맛은 잘 몰랐다. 그래서 커피를 시킬 때면 에스프레소 한 방울에, 시럽과 우유를 왕창 넣어 먹는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K와 나는 오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우리는 루이비통 갤러리(공식 명칭은 Louis Vuitton Foundation이다.)에 갔다가 근처 공원에서 와인 피크닉을 즐길 예정이었다. 오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랬으리라…. 음식이 늦어지자 K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주변 사람들은 구경했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 여자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가방을 여기에 둬도 돼!”
나는 카페 안이 협소해 가방을 잠시 바닥에 내려뒀었다. (비싼 가방도 아니었고, 어디선가 받은 에코백이었기 때문에 가방을 어디에 두건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본 옆자리 여자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다. 굳이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방을 옆자리 의자에 올려두었다.
말을 건 이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옆자리 여자들은 혼자 남은 나에게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걸어서 참 다행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부터 시작해 누구랑 왔는지, 파리는 처음인지, 지금이 여행 몇 일차인지까지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나는 그녀들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한 다음, 예의상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내 질문은 되게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어디에서 왔니, 어떤 곳들을 여행했니 같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흔히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질문들이었다.
딱 2가지 질문만 했을 뿐인데, 그녀들은 자신들에 대한 TMI를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두 여자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왔으며, 모녀 사이라고 했다. 여행한 지 한 일주일쯤 되어 가는데, 곧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파리에서 일 년 한 번씩 온다고 했다. 두 여자 중 젊은 여자는 엄마랑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며 매일매일 싸운다고 푸념하였고, 나는 나도 엄마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는데 너처럼 자주 싸웠다고 위로했다. (두 여자는 굉장히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고, 조금 수다스러운 타입이었다. K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는 마카롱 가게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젊은 여자는 이 집 마카롱을 정말 좋아하는데, 레몬 맛 마카롱은 정말 너~무 맛있다고 말했다. 어찌나 표현력이 풍부하던지 방금 레몬 마카롱을 한 입 먹은 것 같았다.)
친화력 좋은 미국인 여성들과의 대화가 조금 지쳐갈 때 즈음, K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K와 함께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그 덕분에 미국인 여성들과의 대화는 뜸해졌고 나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브런치를 즐길 수 있었다. 방금 나온 따뜻한 크로와상과 오믈렛은 정말 꿀맛이었다. (더 이상 옆자리 여자들이 나의 브런치를 방해하지 않았기에 그 맛이 더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어릴 때는 여행지에서 어떤 음식을 먹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몸 안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들어와야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에서 따뜻한 크로와상과 오믈렛은 허기진 우리가 카페 안에서 먹을 수 있는 최적의 메뉴였다.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루이비통 갤러리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K는 갤러리에 가기 전에 꼭 들를 곳이 있다고 했는데, 그곳은 오랑주(Orange) 통신사였다. 여행지에서만큼은 스마트폰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유심 구매 없이 와이파이만을 이용해 여행하곤 했다. 하지만 K에게는 심카드가 꼭 필요했다.
우리는 오랑주에 들러 여행자들이 쓸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심카드를 구매했고, 직원에게 부탁해 심카드 활성화 작업까지 마쳤다. (ARS로 심카드를 활성화시켜야 했는데, 불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직원의 도움이 절실했다.) 무선 데이터가 활성화되자 K는 뭔가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잃어버린 날개를 되찾은 듯 신나게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메시지를 보냈고,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K의 여행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