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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Sep 04. 2019

에스까르고와 타르타르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K와 나는 예전 같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여행지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K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는 본격적인 여행을 앞두고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숙소에 비치된 생수 한 병을 들이켠 다음, K와 나는 1시간 정도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K는 책상에 아이패드를 세운 뒤 음악을 틀었다. 그러곤 금세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K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나도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뉘었다. 하지만 5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좀이 쑤셨다. 그래서 키를 들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식료품점. 나는 평소 여행지에서 식료품 쇼핑하는 것을 즐긴다. 나에게는 ALDI, LIDL, TESCO, Sainsbury’s, Carrefour가 해롯이나 라파예트 백화점 못지않은 공간이었다. 유럽의 여러 식료품점을 다녀봤지만, Franprix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그래서 무척 호기심이 들었다. 


호기심만으로 식료품점에 간 건 아니다. 물론. 필요한 물건도 있었다. 5일 동안 마실 생수와 과일도 필요했고 호텔 조식을 신청하지 않았기에 아침 식사로 적당한 것이 있는지 식료품점 구석구석을 스캔할 필요도 있었다. 


Franprix는 기대 이상이었다. Franprix는 TESCO처럼 갓 구운 빵을 제공하고 있었고, 즉석으로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갈아주기도 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식료품은 다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와인의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우리나라 편의점에서는 저렴한 와인 4~5개를 가져다 놓을 뿐인데, 이곳에는 정말 다양한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1일 1와인의 꿈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식료품점을 쭉 둘러본 뒤, 나는 2L짜리 생수 한 병과 500mL짜리 생수 2명을 사서 나왔다. 유럽 여행의 가면 정말 물의 종류가 너무나도 많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이러한 것들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늘 물을 고를 때면 잠시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선택은 볼빅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till Water 중 가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면서 합리적인 가격인 물은 볼빅인 것 같다.)


식료품점과 호텔 입구가 열 걸음밖에 되지 않았기에, 계산원에게 봉투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덕에 나는 작디작은 손에 물 3병을 가득 들고 호텔 방으로 향했다. 각자 떨어져 휴식을 취한 지 20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K는 그 짧은 순간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단잠에 빠진 K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생수 한 병과 책 한 권을 들고 또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행에 오기 전, 서점에 들러 산 500페이지짜리 장편 소설이었다. 나는 국어사전처럼 두꺼운 책을 들고 중정으로 향했다. 중정에는 보기만 해도 안락해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오후가 되니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휴식을 취하기 딱 좋았다. 나는 그곳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고, 중정을 통해 호텔 방으로 가는 여행객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약속한 1시간이 지났다.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가 K가 일어났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K는 알람을 맞추고 잔 듯 일어나 있었다. 살짝 배도 고프고, 저녁 시간도 되었기에 K와 나는 나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마침 K는 호텔 주변에 맛있는 스테이크 집을 안다고 했다. 텔레비전 여행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그곳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맛있다고 했다나…. 여행에서 음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기에 나는 뭐든 좋다고 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샹젤리제 거리를 쭉 걸었다. 개선문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야외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휘황찬란한 명품점들까지. 5년 전에도 봤을 법한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K가 찾은 스테이크 집은 숙소에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구글맵을 켠 K가 앞장서고 나는 그 뒤를 쫓았다. 상점가를 지나 골목으로, 그리고 또 골목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 가게는 메인 거리보다 조금 한적한 거리에 위치해있었는데, 구글 맵을 켜지 않고서는 관광객들이 절대 찾아오지 못할 곳이었다. 


아는 사람만 올 법한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스테이크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가게 밖까지 줄을 서 있었다. 개중에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모였고, 현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대기 줄은 가게를 뺑 두른 뒤, 한 번 더 꺾여 길~게 늘어서 있었다. 


K와 나는 동시에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줄을 설 수는 있을 테지만, 적어도 2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이런 쪽에서 우리는 포기가 빨랐다. “어차피 숙소랑 가까우니까,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다른 음식점을 찾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스테이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었다. 식사 시간을 약간 놓친 터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프랑스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였다. 

 

파리에서 첫 만찬을 즐긴 레스토랑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하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메뉴판에는 애피타이저부터 스타터,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빼곡히 쓰여 있었고, 우리는 어니언 수프와 에스까르고, 그리고 타르타르를 시켰다. 프랑스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그런 음식들이었다. 글라스 와인도 빼놓지 않았다. 여행 첫날이기에 뭔가 축배를 들 것이 필요했기에! 


그런데 웨이터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여자 2명이 와서 3가지 메뉴를 시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계속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러다니 이내 테이블로 돌아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타르타르 말인데….”


처음에는 타르타르 재료가 소진되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타르타르라는 음식은 익힌 고기가 아니야. 생고기인데 괜찮겠어?”


유럽에서는 생고기를 잘 먹지 않아 걱정된 모양이었다. 혹시 주문했는데 잘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웨이터의 모습이 조금 귀여워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회, 생선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애들이었다.


K와 나는 웨이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우리나라에도 타르타르와 비슷한 음식이 있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제야 웨이터는 안심이 되는 듯 주방으로 향했다. 


와인을 마시며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주문한 음식들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먼저 어니언 수프가 나왔다. 바게트 한 조각이 풍덩 빠져있는 어니언 수프는 제대로 나의 취향 저격이었다. 기내식만 먹다가 따뜻한 무언가가 속으로 들어오니 몸속에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끓여진 양파의 식감도 좋았다. 흐물흐물한 양파를 씹으면 은은하게 단맛이 올라왔다.

에스까르고
타르타르

다음으로 나온 음식은 에스까르고였다. 사실 5년 전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는 너무 가난했던 터라 이렇다 할 프랑스 요리를 맛보지 못했다. Y와 나는 슈퍼에서 장을 봐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스파게티를 해 먹었고, 그 흔하디흔한 바게트도 사 먹지 않았다. 그래서 미지의 음식이었던 에스까르고는 정말 기대가 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에스까르고는 K의 취향을 저격한 음식이었다.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다. 조금 짠 골뱅이를 먹는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나온 타르타르는 육회가 생김새가 무척 비슷했다. 잘린 생고기가 동그랗게 모양 잡혀 나왔고, 육회 위에 계란 노른자를 올리듯 노란 소스가 그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타르타르는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느끼하면서 상큼한 맛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씹으면 씹을수록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음식임을 확인하게 됐다. K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몇 번 손을 대긴 했지만, 그 역시 입맛에 맞지 않는지 이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파리에서의 첫날. 만찬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9시가 되었다. 오후 9시였지만, 파리의 여름밤은 아직 한낮 같았다. (서머타임이 있는 유럽의 여름은 오후 10시가 넘어야 겨우 어두워진다.) 시차 적응에 실패한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도 연신 하품을 했다. 배가 고파서 온 레스토랑이지만,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우고 나니 먹는 것보다 잠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내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요청하고 나가려는 차에 웨이터는 우리가 남긴 음식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식이 맛없었니?” 


입맛에 맞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웨이터에서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음식이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K와 나는 “음식은 훌륭했어! 다만, 우리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많이 먹을 수 없었을 뿐이야. 고마워!”라고 말하며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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