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Sep 16. 2019

파리에서 니스로, 잠시만 안녕!

여행 5일 차, 우리는 파리를 떠나 니스로 향했다. 왜 사람들이 그러지 않나. 나이가 들면 휴양지를 좋아하게 된다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휴양지에만 며칠 있으면 좀 심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5일을 빡세게 여행하고 나니 휴양지에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스는 도시 여행에 지친 우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이라고 봐도 좋다.


K와 나는 아침 일찍 정들었던 첫 번째 숙소와 이별하고 리옹역으로 향했다. 메트로를 타고 리옹역으로 향하는 중 생경한 광경들이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메트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아지와 함께 대중교통을 타려면 이동장이나 이동 가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그 어떤 가림막 없이 반려견과 모든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메트로를 타는 강아지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영국에서 크러프츠 도그쇼를 보러 갔을 때 나보다도 몸집이 큰 대형견들이 컨벤션 센터와 연결된 언더그라운드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의 일이다. 영국에서도 보통 반려견과 함께 대중교통을 타진 않았다.)


K와 나는 리옹역에서 니스로 가는 떼제베(TGV)를 탈 계획이었다. 우리는 미리 e티켓을 예약해뒀기에 탑승 플랫폼만 잘 찾으면 큰 문제없이 니스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옹역은 꽤 넓었다. 그리고 탑승 시간 30분 전까지 탑승 플랫폼이 어딘지 공지되지 않아 혹시 니스행 열차를 놓치는 게 아닌가 하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처럼 K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번갈아 전광판을 앞을 맴돌았다. 탑승 시각이 10~15분 정도 남았을까. 전광판 화면이 바뀌면서 우리가 탈 열차의 탑승 플랫폼이 공지됐다. 플랫폼을 확인하자마자 K와 나는 혹여나 열를 놓칠까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서둘러 플랫폼으로 향했다.


니스로 향하는 열차는 2층짜리 기차였다. 우리는 짐칸에 캐리어를 싣고 배정된 좌석에 찾아가 앉았다. 여행자 보험을 들지 않아 혹시 짐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시민의식을 믿어보기로 했다. 기차는 프랑스 여러 도시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갔다. 5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슬며시 파란 바다가 보였다. 칸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칸에서 니스까지는 기차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즉, 곧 있으면 니스에 도착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5일 동안 머물, 휴양지 니스에!

5일 내내 나의 휴식처였던 니스 해변
하루 일과 대부분이 이런 모습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 공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바다가 어쩜 저렇게 두 가지 색으로 나뉠 수 있을까? 언제 봐도 예쁜 니스 해변이다.
해변에 앉아 하리보 젤리를 질겅질겅

니스에서의 5일은 너무너무 좋았다. 비현실적인 파란 바다와 따스한 햇볕, 그리고 도시를 가득 덮은 음악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니스 역 근처 굴다리에서는 종종 버스킹이 열렸고, 우리가 니스에 머무는 동안 바닷가 앞에선 뮤직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니스에서 나의 하루는 굉장히 단조로웠다. 나는 매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안에 수영복을 챙겨 입고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과일과 빵, 물 등을 산 다음 해변가로 향했고, 비치타월을 깐 다음 과일 등을 먹으며 일광욕을 했다. 때때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음악을 듣기도 했다. 햇빛이 뜨거워지면, 옆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눈짓으로 내 짐을 부탁한 다음, 바다로 뛰어들었다. (짐을 두고 자리를 비울 때,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짓하는 것은 니스 해변가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옆사람과 눈을 마주친 다음, 내 짐을 향해 고개를 까딱 흔들면 주변이 있는 사람들이 내 짐을 대신 봐주곤 했다.) 차가운 바닷물에서 10여 분 수영하고 나오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처음엔 이 단조로운 일상에 K도 함께했다. 그러나 K는 카페는 좋아하지만 커피는 마시지 못하는, 디즈니랜드는 좋아하지만 놀이기구는 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K는 바다를 좋아하지만, 일광욕을 싫어했다. 또 물이 무서워 수영은 꿈도 못 꿨다. 그래서 이튿날부터 K는 여행 커뮤니티에서 한국인 동행을 구해 니스 주변 도시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K에게 하루 종일 해변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일정은 곤욕이었을 것이다.)


나와 K는 매일 아침 호텔 방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각자의 여행을 즐긴 뒤 이름 오후에 다시 만났다. 나는 K와 헤어지면 어김없이 바닷가로 향했고, 바닷가에서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근처 음식점에서 혼밥을 했다. 오후에는 주로 미술관을 다녔다. 하루에 하나씩, 니스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게 무척 즐거웠다. (다들 니스를 휴양지로만 알고 있는데, 니스에는 정말 좋은 미술관이 많다.)

샤갈 박물관
마티스 박물관
가장 먼 곳에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마티스 박물관
현대 미술관에도 훌륭한 작품이 많았다.

K와 나는 따로따로 시간을 보냈으나 종종 메시지를 보내며 우리의 하루를 공유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는 꼭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의 저녁 식사에는 늘 초대 손님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초대손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K와 함께 니스 주변 도시를 여행한 한국인 여행자들이었다. 대체로 우리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었는데 우리는 함께 식사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늦은 밤이 되면 같이 해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곤 했다. 또래이다 보니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우리는 종종 낮 시간에도 만나 함께 해수욕을 즐겼는데 K는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한국에서도 연락하고 지난다고 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여동생과 함께 유럽 여행을 온 자매, 한 달째 배낭여행 중이라는 새까맣게 타버린 대학생, 공사장에서 노가다 일을 해 번 돈으로 니스에 왔다는 갓 제대한 복학생…. 정말이지 다채로운 조합이었다.

해변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는 것.  매일 밤 우리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이었다.

그들 중에는 K와 정말 잘 맞는 친구도 있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는데 그녀는 누군가의 말에 맞장구를 굉장히 잘 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늘 하이 텐션을 유지했는데, 이 점이 K와 잘 맞았다. (사실 난 늘 낮은, 그리고 안정적인 텐션을 유지하는 편이다.) 나와 비슷한 친구도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빡빡 민 머리, 그리고 조금은 험상궂은 표정까지. 절로 뒷걸음질 쳐지는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와 동갑인 그는 니스에 있는 사촌 집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긴 머리였는데 니스의 축복받은 날씨가 덥게 느껴져 머리를 빡빡 밀었다고….


그와 나는 낮은 텐션을 유지하고 있는 게 비슷했다. 그리고 사소한 취향이 일치했다. 어느 날, 해변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와인 코르크를 따기 위해 주머니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들었다. (내 건 기성품이었지만, 그가 가진 건 왠지 장인이 만든 수제품 같았다.) 그때 난 나를 제외하고 여행할 때 맥가이버 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런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하루는 다 같이 니스에서 유명한 수제버거집을 갔다. 각자 버거와 음료를 주문하는데, 그와 나는 당연하게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가 내게 물었다.


“너 다이어트 콜라 좋아해?”

“응!”


“나도, 근데 다이어트 콜라 시키면 꼭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햄버거 먹으면서 다이어트 콜라 시킬 바에는 그냥 일반 콜라 먹으라고. 근데 난 다이어트 콜라가 더 맛있어서 먹는 거거든.”


신기했다. 사실 그와 나는 다이어트를 할 만큼 통통한 체격은 아니었다. (난 어릴 땐 마른 편이었고 지금은 보통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마른 편은 아니지만, 대체로 건장했다.) 즉, 우리가 다이어트 콜라를 먹는 건 순전히 맛과 취향 때문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개인 취향.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5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파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