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업

"예쁘다"라는 형용사

by 어떤 숨

예쁜 작업물이 좋다.


이 “예쁘다”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다분히 옛날 마인드지만) 여성스러움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멋있다”라는 말의 시원스러운 어감보다는 좀 더 촘촘한 밀도로 “보기 좋음”을 표현한다고 생각되는 말이다. 그리 크지 않은 내 유리 작업물에 대한 칭찬 역시 멋있다보다는 예쁘다는 말로 더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작업의 크기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오밀조밀하게 보기에 좋음.” 그 정도 표현이랄까. “웅장하고 멋있다”는 표현은 많이 들어봤어도 “웅장하고 예쁘다”는 좀 어색하기도 하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 시도하는 작업도 “촘촘함”의 정도를 여러 번 테스트하는 것의 연장선이다. 유리조각을 배열할 때 의도적으로 틈을 만드는데 가마에서 구워진 뒤 뚫려있는 모양새가 성글면 영 못나 보인다. “틈새”나 “여유”가 아닌 그저 “구멍”으로만 보여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럼 다시 ‘예뻐지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배열을 시작한다. 내 눈을 만족시킬만큼의 촘촘한 짜임새로.





사실, 생활에서나 전반적인 면에서는 “멋지다”는 칭찬을 더 좋아한다. 이 예쁘다와 멋지다의 어감 차이는 어린 아이일 때부터 교육되는 것 같은데, 이런 일화도 있다. 첫째가 유치원생일 때 학부모 상담기간이었다. 아이들이 쓰는 교실의 작은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아이 담임선생님이 “가족들이 성교육을 잘 시키셨나봐요.” 라고 하셔서 한 번도 그런 교육을 해본 적 없는 나는 “네?”하고 반문하며 당황했다. 내가 아이들과 그런 대화를 해본 적이 있던가 잠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에 선생님은 “성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여섯 살 아이들이 “예쁘다”는 여자한테 쓰는 말이고, “멋지다”는 남자한테 쓰는 말이라고 토닥거리며 싸우자, 평소에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멋진 여자, 예쁜 남자 소리를 들은 우리 큰 애가 “아니야!” 하면서 또박또박 반박을 했다고. 그 때 아이가 기특하게 여겨지셨던 모양인지 “저도 평소에 아이들 교육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인데 지우가 그렇게 얘기해서 놀랐어요.”라며. 아이들에게도 그 형용사들에겐 성별이 느껴지나 보다. 사실 난 멋진 여자, 멋진 엄마가 되고 싶은데, 작업물은 또 예쁜 걸 좋아하고. 뭐 다 그런 거지.


“예쁘다”는 말 자체를 좋아하게 된 생각나는 일이 있다.


친정 엄마와의 인연으로 알고 지내는 분 중 한복을 짓는 (유명한) 분이 계시다. 선생님 모습만큼이나 고운 한복을 짓는 일을 하시는데, 언제 봬도 정말 "곱다"라는 말이 나온다. "한복"이라는 옷이 주는 느낌도 그렇지만 늘 단정히 빗어올리신 머리와 소녀처럼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그만큼 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둘째 딸이 태어나기 몇 주 전 우연한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보시고선 집으로 아이 배냇저고리를 보내주셨다. 앙증맞은 크기의 옷과 배꼽싸개까지 들어 있는데 손수 메모까지 보내주셔서 감사 인사 차 찾아뵈었더니 그걸 지으신 분 이야기를 해주셨다. “제가 지은 옷은 아니고 저도 선물받은 옷이에요. 두 벌을 지어주셔서 하나는 우리 아들이 나중에 아이 낳으면 주려 하고 하나를 보냈어요. 그분은 삶이 참 이쁜 분이에요. 그런 분이 지은 옷이라 참 귀해요."라고 하시는데 옷에 대한 감사함이 든 것도 물론이지만 그 말씀이 참 욕심 났다. 이쁜 삶은 사신 분이라니. 나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졌다. 내 스스로도, 남이 보기에도 이쁜 삶.


세상에 예쁜 외모, 멋진 태도의 사람이 많고 많지만, 예쁜 삶이라니. 두고두고 발음하며 곱씹어봐도 기분 좋은 말이다.


그런 생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어떻게 살아야 이쁜 삶이 될까.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모습을 아닐 텐데 어떤 촘촘함으로 엮인 삶이 그렇게 보일까. 예쁜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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