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가심비

좋은 관계

by 바쁜 거북이

딸이 나에게 물어온다. “확실히 딸이 좋지?” 다 큰 딸이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걸까?

동생에게 질투를 하는 걸까? ‘그런 시기는 지난 것 같은데’ 하면서도 “확실히 얘기는 잘 통하는 거 같아"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거밖에 없어?” 또 묻는다. “많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딸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배시시 웃는다.


이어 내가 말했다. “딸이 가성비가 좋은 거 같아"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가성비는 아들이고 딸은 가심비가 좋은 거야"


듣자마자 그런 거 같다. 우리와 같은 특수한 상황의 가족이 아니어도 아들과 딸은 확실히 역할이 다른 것 같다. 요즘엔 딸 같은 아들, 아들 같은 딸도 많고 실제로 우리 아들은 나와 가족에게 재롱둥이이긴 하다.


그에 비해 딸은 의지가 되고 나와는 잘 통하는 동지이자 친구 같은 존재이다. 마음이 잘 통해서 가심비가 좋다고 한 것 같다.


딸은 어릴 적 내가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면 가지 말라고 떼를 썼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기였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간신히 떼어내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하곤 했다.


딸의 눈에는 냉정하게 보였던 엄마에 대한 반감인지 퇴근하면 반가움보다는 토라진 모습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아이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아이는 섭섭한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자란 것 같다.


좀 커서 자기 의사를 대놓고 표현하더니 불만도 서슴없이 표현했다. 그런 점이 처음에 섭섭하고 괘씸했다.


‘감히 고생한 엄마에게 그럴 수가 있나' 싶은 감정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알 것 같다. 아이는 소통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타인에게 못할 말을 그나마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높은 엄마에게 시도한 것인데 나는 대화의 내용보다는 공격적인 말투를 꼬투리 잡았다.


지금은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그 당시의 딸은 정말 밉살맞았다. 아픈 동생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고 퇴근하는 나에게 “엄마 고생했어요"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때가 사춘기였나 보다. 나는 딸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갈등은 어른이 되고 대화가 많아지자 점차 풀어졌다. 예민한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딸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립이 심해지면 그냥 한바탕 하는 편이 낫다. 한바탕 할 때도 서로 예의는 지킨다.


그것이 내가 정한 룰이다. 상처가 될만한 말은 돌려 말한다. 한 번은 “야 이 거지 같은 00야"라는 말이 입에 맴돌았는데 돌려서 “이 부자 될 00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 웃음이 터진다. 체신머리가 없긴 하지만 진지한 경우가 더 많으니 상관없다.


바닷가에 사는 용이 가끔 아이들과 내 사이를 질투한다. 내가 쏟아붓는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아이들이 내편을 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거든요, 노력하지 않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거든요'라고 말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도 나름 노력하고 있는 걸 알지만 오랜 시간 쌓여온 감정의 고리는 그리 쉽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저녁시간!


아들이 저녁을 먹고나더니 “엄마 오늘도 최고예요, 너무 맛있었어요" 대충 차려준 음식에 답례를 하고 딸은 동생에게 나 대신 “말을 참 이쁘게 하네 우리 동생"이라고 해준다.


역시 ‘가성비 가심비'가 좋은 아이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심비'가 좋은 엄마이고 싶다. 아이들이 나에게 투자한 마음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고 싶다.


오늘 하루도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으니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