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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Nov 28. 2022

 삶이 삶다워지는 필요충분조건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질문이지만 가끔은 상상만으로도 위로와 응원이 될 때가 있으니까.


 우리 팀에는 아이 없는 기혼자가 두 명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출산과 육아가 두렵단다. 공감한다. 경험자인 나도 두렵다. 경험하지 않은 자가 출산과 육아의 실체를 어찌 알까 싶다가 이내 그들은 너무 똑똑하다고 결론 냈다. 이처럼 겪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고통이었는데 나는 너무 만만하게 봤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은 육아의 터널 속에서 처음부터 터널로 들어서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는 내 꼴이란.  

   

 선택 후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너무 무거워 가끔은 귀도 막고 눈도 감고 에라 모르겠다 도망가지 싶다가도 엄마 배고파 엄마 어디야 엄마 있잖아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멘트 들리면 다 들릴 정도로 크게 한숨 쉬면서 주저앉아버린다. 그래, 사는 게 별건 가? 내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은 이타적 동물이다. 내가 행복을 주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그도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 출산, 육아는 삶이 삶다워지는 필요충분조건임이 틀림없음.     


 “선생님, 있잖아요. 엄마가 연락이 왔어요. 저랑 제 동생이 보고 싶대요.”     


요즘은 이혼이 흔해서인지 아이들은 부모의 별거를 숨기지 않는다. 이혼이 흠도 아니니 나도 쿨하게 묻는다. 아버지가 평소에 요리를 잘하신다는 말에 나는 혹시 이혼하셨나 싶어 H에 물었다.      

 “저랑 제 동생이 어릴 때 엄마가 심한 우울증에 걸렸었데요. 우리를 키울 수가 없어서 따로 산데요.”     


 나는 가볍게 물었고, 아이도 가볍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요리를 잘하셔서 좋겠다. 선생님 남편은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먹기만 할까?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고서 우리 대화는 끝났다. 아무렇지 않던 아이가 오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아니다. 슬픔이 가득하다.      


 “네 생각은 어때? 엄마 만나고 싶어?”

 “동생은 만나고 싶데요.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엄마를 만나고 싶다면 나한테 묻지도 않았겠지. 이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보다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저리 슬픈 눈으로 나에게 물었겠지.     


 “만나고 싶지 않으면 만나지 않아도 돼. 어른들이 하자는 대로 꼭 할 필요는 없거든. 네 생각이 정답이야. 네가 보고 싶으면 보는 거고, 보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면 돼.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해. 알았지?”     

 “엄마는…. 지금 6살 딸이 있데요. 지금 남편한테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는데 6살 동생한테는 말을 못 했데요. 6살 딸에게 허락받으면 우리를 만나러 오겠데요.”


 순간 나는 화가 치솟았다. 이 엄마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학부모고 뭐고 나는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엄마냐? 우울증 핑계를 대고 딸을 둘이나 버리고 갈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보고 싶은 건 또 뭐냐? 새로 시작했으면 새 가정이나 충실할 것이지 양쪽 집에 혼란을 주는 건 무슨 욕심이냐? 니 마음이 그리 중요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어미 같으니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H를 안아주는 일뿐이었다. 꼭 안으며 다시 말했다.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해. 동생도 아빠도 엄마도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선생님께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이런 고민을 들을 자격이 있나 싶어질 정도로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은 이리도 행복하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한참을 생각했다. H 엄마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했다. 신동엽이 그랬다. 편하게 살려면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행복하게 살려면 결혼해야 한다고. 결혼, 출산, 육아로 맛본 행복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대가를 치르려면 희생과 책임이 필요하다. H 엄마는 희생과 책임으로 온몸 부서지라 애쓰다 고개 들고 잠시 생각해보니 행복은커녕 몹시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모래알 같은 행복이라도 있었으면 고개 저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텐데 H의 엄마는 어쩌면 행복 뒷면의 불행만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불행, 생면부지의 고통이 이 엄마를 이리도 모질고 이기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딸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주고 싶었을까? 딸들이 엄마한테 가만히 기댈 때 얼마나 행복했을까? 책임감에 파묻혀 힘들어도 이리 포근하게 다가오는 딸로 행복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나에게 H 엄마를 욕할 자격은 없다. H 엄마는 두고 온 딸들에게 이제야 보이는 그 ‘행복’을 나눠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 카레 싫어, 김치찌개로 해주세요. 엄마 나 시간 없어. 여드름 빨리 짜 달라고. 여보, 속 안 좋으니 꿀물 타 줘. 가득 쌓인 빨랫감과 식탁 밑에 깔린 음식물 부스러기, 현관에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찌꺼기 가득한 화장실 배수구까지 내 등을 떠미는 망할 책임감은 오늘도 24시간 완전 가동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행복을 주는 사람이 먼저다. 내가 행복을 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사랑한다 이런 피드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내게 무한정 기대는 세 명이 있다는 사실은 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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