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백범일지
왜 태어났는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남는다. 탄생과 생명 유지에 대한 당위성을 논하라면 나대로 할 말 아니, 투정이 많지만,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이 그 문제는 논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제는 조용히 덮기로 한다. 열심히,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너무 길드는 것 같아 반발심이 들기에 그저 어떻게 살면 좋을지 생각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법륜스님은 자신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살라 했다. 자기 분수를 알고 그저 인정하며 살라는 말이다. 자신에게 불만이 없을 수도 없지만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다. 남들 보기엔 변명이든 핑계든 나에 대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김구가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지 전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앞잡이, 의병, 밀정, 저항시인 그 어느 것도 지금의 나와 견주어 답을 찾을 수 없다. 아니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먹고살기 급급하다가 어느 날 총 맞아 죽었을지도. 불행한 시대를 탓하고, 무능한 정부를 원망하며 더러운 팔자라고 자조하다 명대로 죽었겠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고 결론 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저항이든 협조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 가능성이 가장 크다. 지금의 나로 봐서는 내가 가진 모든 열정의 방향은 다 나를 향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행복이라 하고, 의무를 불행이라고 한다면 둘은 완전한 평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어느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기질이 원인이 되기도 하고 살아온 환경의 원인으로도 권리와 의무 즉, 행복과 불행의 불균형은 불가피하다.
행복하기 위해 불행과 맞서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행복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니, 나는 행복과 불행 두 마리를 다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부루마불 게임에서 땅을 사지 않고 계속 돌기만 해도 월급은 받아 살 수 있으나 한두 바퀴 돌고 나면 그때부터는 계속 도는 것도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처럼 불안해진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살기 위해 나도 땅을 사서 지뢰를 놓아야 한다. 내 지뢰를 밟는 자들을 보며 나는 행복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로 보면 생은 너무 잔인하다.
[백범일지]에 김구는 일관되게 불행을 호소한다.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짧은 소견에 자살을 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 위에 손톱으로 ‘충’ 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드디어 숨이 끊어졌다...(중략) 그 후로는 여러 사람의 주의로 자살할 기회가 없었다. (p.106)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중략)...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고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298)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더라도 행복을, 내 권리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고는 하나 온몸으로 고통을 마주하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버틴 삶은 숭고하다. 타인을 위해, 조국을 위해, 미래의 후손을 위해 김구는 생의 바다를 건넜을지도 모르지만, 책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김구는 자신의 삶을 잘 살았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으로 점철된 시대에서 독립을 향한 길, 즉 불행의 길, 그저 의무를 다하는 길 말고는 살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벼랑에서 가지 잡고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니고,
움켜잡은 그 손마저 놓아야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p.94)
김구는 자기 앞에 놓인 의무와 책임을 가장한 불행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나서야 고해가 잔잔해졌다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진짜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기로 하고 왜놈의 목을 힘껏 밟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김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움켜잡은 손을 언제든지 놓을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더없이 가벼워져 어쩌면 손을 놔 버리는 것이 즐거웠을지도. 그 길이 지금의 기준에서는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옳다고 말할 수 없어도 그가 살던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벼랑 끝의 행동은 그뿐이었으므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기에 한 줄 한 줄 어떤 심정으로 기록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사지로 보내기 전 사진을 찍을 때나 그들이 탄 차가 무정하게 지나간다고 말한 그의 마음을 내가 어찌 감히 헤아릴 수가 있으랴.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벼랑 끝 손을 놔 버리는 용기는 무엇인지 생각한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어떤 아쉬움이 남을지 생각한다. 나는 먼 미래까지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할 정도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내면 그만. 주어진 지금, 오늘을 잘 보내면 지나고 나서도 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면 된다. 그렇더라도 생각만큼은 늘 말랑하게 유연했으면 좋겠다. 내 옳음을 영원한 옳음이라 주장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부러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사소한 불쑥 튀어나오는 호불호와 시시비비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호불호와 시시비비는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 뻔하기에 부질없음에 영혼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주 사람이 싫고 사람이 두렵고 사람에게 상처받더라도 사람에게 희망을 보고 사람에게 위안받으며 사람에 기대 살았으면. 나는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를 보면 이름 없이 떠나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생각난다. 나도 평생을 회고해야 할 때가 오면 내 나라를 조용히 지키는 키 작은 측백나무가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