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계속 눈이 내린다.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인 여기서는 눈이 내리면 시간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을 맞으면 생각이 그치고 말과 행동도 짧게나마 멎는다. 눈은 이토록 압도할 만큼 강력하다. 이런 눈의 힘이 소설을 끝까지 밀고 간다. 차갑고 뜨거운 눈, 얼다 녹기를 거듭하는 눈은 독자를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보내버린다. 감히 생존의 위대함을, 학살의 고통을 상상할 수는 없다. 활자로 만들어진 눈 세상에 있다 보면 횃대에 앉아있다 갑자기 스러지는 새처럼 안구가 빠질 것 같은 편두통이 오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과 마주한다. 경험하지 못한 죽음을 이토록 차갑고 강력히 전하면 제주 4.3 사건은 결코 우리와 작별하지 않게 되리라. 결코 작별할 수 없도록.
절박함,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뒷걸음질치거나 찰나의 여유를 부리는 순간 죽음이라는 냉정함. 서럽지만 이를 이길 힘은 없다. 눈이 그렇다. 눈은 절박해서 내리는 것이다. 간절한 눈이 내 어깨에 앉으면 나는 어느새 이길 수 없는 시간 속이다.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같은 눈송이가 내리는지 나는 지금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