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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Aug 21. 2023

가시나무

박준 [계절산문]을 읽고

그런 날이 있죠. 흘러나오는 가사가 귀에 딱딱 꽂히는 날. 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주는 일요일 늦은 밤 우연히 나오는 [가시나무]라는 가사가 그랬습니다. 모르는 가사도 아니고 늘 들어오던 가수인데 목소리는 귀이개가 되어 심장을 긁어댔습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과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 수백 개 가시가 되어 내 몸을 덮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가시에 찔린 어린 새도 벌써 날아갔으니 그대도 어서 가라는 말이 참으로 아프더군요. 얼마나 쉬고 싶었을까요. 당신과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까요. 어둠과 슬픔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는 말은 달리 보면 밝고 기쁜 날에는 꼭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아니겠어요.  

    

아이가 열이 펄펄 나서 쳐지면 엄마는 대신 아팠으면 싶어요. 아이의 뼈가 휘어져 있으면 내 뼈랑 바꾸고 싶어요. 아이가 수술을 받아야 하면 엄마는 수술을 대신 받고 싶지요. 대신할 수 없기에 엄마는 어둡고 슬퍼져도 아이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 됩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 전부니까요. 엄마의 어둠과 슬픔에 아이가 찔릴 바에는 아이를 아예 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가시나무에서 가시는 꼭 필요합니다. 없으면 생존에 위협을 받겠지요. 나무를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막입니다. 사람도 저마다의 어둠과 슬픔이 없으면 무사히 숨 쉬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어두워지고, 한없이 슬퍼져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서 가시는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가시가 유독 뾰족하게 느껴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 가시도 당신을 보호하는 어둠과 슬픔이라 생각하면 찔렸던 마음이 아물어집니다. 내 가시를 다시 보게 됩니다. 나는 어떻게 타인을 찌르고 있나 생각하게 됩니다.     


딸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수가 적어집니다. 이유를 묻고 내가 해결책을 찾아주고 싶지만, 물어도 말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저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아이의 가시에 찔렸을 때 조용히 넘어갈 엄마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아이의 어둠과 슬픔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할 바에는 서로 시간을 갖는 것이 맞습니다. 어차피 어둠과 슬픔은 자기만의 것이라 타인의 쉴 자리가 되지 못하니까요. 지금은 모진 바람이 부는 때이니 혼자서 슬픈 노래를 실컷 부르다 보면 가시 문을 열고 밝게 웃으며 나오는 날이 있겠지요.      


내 웃음을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항상 내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내 무성한 가시나무숲의 메마른 가지들은 어쩌란 말인지. 저의 가지들이 부대끼고 부러지는 소리까지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늘 웃었으면 좋겠다니 나는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가시가 돋친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내 가시에 찔린 그 사람은 더 찔리기 전에 달아나버렸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당신과 함께하기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았습니다.     


[가시나무]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둠 속에 많은 빛이 더 퍼져 보입니다. 가로등, 아파트 전등, 신호등, 간판의 네온사인, 자동차의 라이트, 점이었을 빛이 퍼져 보이는 이유는 저마다 가시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안경을 준비했습니다. 안전하게 운전해야 하니까요. 내 가시가 다치지 않도록 움켜쥐고 세상의 수많은 가시와 만나고 헤어집니다. 내 헛된 바람은 나와 내 딸의 가시가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충분히 쉴 곳이라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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