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드메가 뭐길래
스드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의 앞글자만 따 만들어낸 웨딩 업계 용어. 결혼식에 있어서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라 보아도 무방하다. 내 얼굴의 장점을 가장 잘 살려줄 메이크업 아티스트, 내 젊음의 싱그러움을 최대한 담아줄 수 있는 유능한 사진작가, 그리고 결혼식의 꽃, 웨딩드레스.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중요하지만 내 기준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내 생애 단 한 번밖에 입지 않을 웨딩드레스를 빌릴 샵 선정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일을 하느라 한 달여 만에 임신 때 쪘던 살이 다 빠졌다고 했을 만큼 바쁘게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남들 다 예쁘게 입고 찍는 백일 사진을 내복을 입고 찍었더랬다.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그때 나를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나 꾸미는 걸로 자기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나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리고 특히 옷에 있어서는 더더욱. 갖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런 날 키우며 엄마는 너 하나 키우는 게 다른 애들 열명 키우는 것보다 힘들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랬던 나는 어릴 적엔 유독 공주님 드레스를 좋아했다. 엄마 아빠와 자수정 동굴 투어를 갈 때도 나는 청바지를 입지 않고 드레스를 입고 가겠다고 똥고집을 부려 다른 아이들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편하게 걸어 다닐 때 홀로 구두를 신은 나는 돌부리에 걸려 입고 있었던 핑크색 프릴 원피스가 다 젖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만 내 인생 가장 기억에 남는 드레스는 나의 첫 학예회를 기념해 엄마가 사준 파란색 셜리템플 원피스. 합창단을 지휘했던 기억은 아득하지만 그 드레스를 입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절대 잊지 못한다. 그만큼 내 눈에 예뻤던 그날의 드레스.
그런데 기껏해야 이십만 원가량 했을 그때의 8세 아동용 드레스와 다르게 웨딩드레스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고가였다. 내가 원하는 웨딩드레스 샵은 렌털 비용이 촬영드레스 세 벌에 본식 드레스 두 벌을 포함해 기본 700만 원. 여기서 뭐만 하면 추가금이 붙는 웨딩 업계를 고려하자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드레스에만 천만 원가량을 써야만 내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스튜디오, 메이크업, 모두 비용이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복병은 드레스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조금 다운그레이드를 해보려고 했지만 다른 곳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가슴은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이 샵에서 해야만 해... 이 샵이야.
"나도 나 같은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
"응?"
"나도 나 같은 엄마 만나서 너처럼 살아보고 싶다. 부럽다."
언젠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건넨 말이다. 일남삼녀 중 셋째 딸. 우리 엄마를 설명하는 수식어 중 하나. 어릴 적 잠이 오질 않아 재밌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내게 엄마는 꼭 다른 이야기가 아닌 엄마의 네 남매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가장 많이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은 외삼촌이었다.
위로 여러 해 터울이 있는 이모들과 다르게 삼촌은 엄마 아래로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래서 연년 생끼리 투닥거렸던 그들의 일화는 언제나 들어도 웃기다. 그중 가장 웃긴 일화는 반년 간의 투병(?) 생활을 끝내고 친구들보다 한 학기 늦게 입학한 삼촌이 학교에 가자마자 바로 다음날 받아쓰기 시험을 치게 된 썰. 엄마는 무조건 옆자리 애 시험지를 베끼라고 조언했고, 그래서 순진한 삼촌은 옆자리 친구의 답안을 모조리 베꼈고. 근데 웬걸, 이름까지 베껴서 선생님께 된통 혼나버렸다. 아니 어떻게 이름까지 베껴? 너네 삼촌 진짜 순진하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웃기다는 듯 까르르 웃어댄다.
하지만 그 재밌는 엄마의 인생 에피소드 중 나의 마음을 후벼 파는 이야기가 딱 두 개가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경숙 씨의 첫 드레스 이야기. 초등학생 발레 부였던 엄마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서 공연을 하는 날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발레부에 들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선생님에게 발레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꾸역꾸역 우겨서 발레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생 모두 튜튜 드레스를 착용한 채 버스에 오르게 되었고 경숙 씨는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줘서 양손 가득 버스를 탔는데 일찍 엄마를 여읜 경숙 씨에게는 그런 도시락이 없었다. 엄마에게 들린 건 할아버지가 싸준 삶은 계란 단 두 알과 사이다 한 병. 불평할 만도 한데 당시 경숙 씨는 특별한 날에야만 마실 수 있는 사이다를 삼촌과 나누지 않고 혼자 마실 수 있게 된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감격도 잠시, 어디선가 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킁킁대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뿔싸, 사이다에 정신이 팔려 계란 두 알이 자신의 엉덩이 밑에 깔려버린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계란도 계란이지만 그로 인해 엄마의 드레스는 엉망이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다른 옷도 없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엄마는 결국 계란 냄새가 나는 튜튜 드레스를 입고 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그때 설움이 폭발했다고 한다. 엄마 없는 설움이,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는데 자기에겐 계란 두 알밖에 없었던 설움이,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 튜튜가 걸맞지 않은 옷이라는 설움이. 그래서 그랬을까. 봄소풍 때가 오면 엄마는 나에게 꼭 도시락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더 싸서 건넸다. 그리곤 내게 너네 반에 있는 누구누구랑 누구누구한테도 이 도시락을 꼭 전해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하고 싶은 드레스 샵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다른 데를 보고 있는데 성에 차질 않아."
"얼만데?"
"촬영 드레스 세 벌, 본식 드레스 두 벌 대여에 칠백만 원이래. 진짜 비싸지."
"그냥 해."
"응?"
"우리가 해줄게. 그냥 거기로 계약해."
드레스 가격 때문에 골머리를 끙끙 앓던 내게 엄마는 본인들이 드레스 비용을 대겠다며 걱정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드레스샵을 계약하라고 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이군요. 매번 이렇게 받아야만 감사 기도를 드리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니, 그저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가는 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청담동으로 향했다. 생애 처음으로 입어보는 웨딩드레스는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벌 한 벌 입고 나올 때마다 연신 카메라로 찍어대며 너무 이쁘다고 말해주는 엄마. 엄마 카메라 속의 나는 환하게 웃으며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 샵 진짜 잘 골랐다. 다 이쁘네."
"그렇지, 너무 예뻐. 고마워 엄마."
"단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인데. 그냥 예쁜 거 입어."
나에게는 엄마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나는 초등학생 때도 드레스 사주는 엄마가 있었고 서른이 되어도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는 엄마가 있었어. 엄마는 그런 엄마 없이 너무 외로웠겠다. 엄마, 고마워. 우리에게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꼭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게. 그리고 그때는 엄마의 드레스를 내가 입혀줄게. 우리 그렇게 다시 또 엄마와 딸 사이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