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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Dec 29. 2019

아우토반을 달렸던 사내

그의 긴 그리움에 대하여


프로그래밍 학원을 다닌다. 강사는 나이 든 기계체조 선수를 연상시켰다. 키는 165cm 정도, 상체 중 어깨가 발달했고 연령 대비 뱃살은 거의 없는 편으로 다부진 체격이었다.


첫 수업. 스스로 독일어 전공이며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밝혔다.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과 독일어 박사 학위 사이 간극은 묻지 않았다. ‘내가 이래 봬도’로 함축되는 말에 별다른 리액션은 필요 없다. 화자는 어차피 하고 싶은 말이고, 청자는 차라리 빨리 듣고 본론으로 돌아기길 바랄뿐이다.


프로그래밍은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닮았다. 문법을 이해하되 입이 아닌 손으로 연습한다. 부모님의 투자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만큼 배웠고 교환학생도 다녀왔으나 여간 실력이 늘지 않았다.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영어보단 수학이었고, 영어로 확장된 세계보다 시를 읽으며 펼쳐지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컴퓨터 언어는 달랐다. 프로그래밍의 세계관은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정교했다. 입력이 바르지 않다면 실행되지 않거나 결과가 제멋대로 도출됐다.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 배움에 적극적이라 질문을 주저하지 않았고, 강사는 반가워했다.


데이터 처리 속도와 효율을 논하던 중, 그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지나온 어느 세월, 한 지점의 추억을 불현듯 마주한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옅은 미소 끝에 포르셰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렸던 이야기를 한다. 속도 > 아우토반 > 독일로 연관검색어가 이어졌을 테고, 반짝반짝 빛나던 그 시절 본인을 내뱉지 않고는 참지 못했으리라.


그에게 독일은 중요한 정체성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와 독일, 박사학위를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딛고 있는 현 주소지, 그 어디에도 독일을 발견할 수 없어서일까. 그는 그 시절을 거듭 소환하며 긴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무엇을 하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우토반 에피소드를 갈무리하며,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허공을 맴돌던 눈동자가 이내 교재로 돌아왔다. 그 날 수업이 끝나고, 오늘따라 헛소리를 많이 해 미안하다며 그가 먼저 강의실을 나섰다.


두툼한 검은색 코트의 깃이 정갈히 세워진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결코 우연히 세워진 깃이 아니었다.오랜 시간 구사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멋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독일을 발견했다. 짐짓 멀어졌다고 생각한 그 아름다운 시절이 저곳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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