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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Dec 08. 2021

그 성냥의 발화율


엄마의 부엌짐을 정리하다 서랍 깊은 곳에서 성냥갑 몇 개를 발견했다. 마침 캔들 라이터 가스가 다 떨어졌던 터라 새로 주문할 때까지 쓸 요량으로 세 개의 성냥갑을 내 집으로 가져왔다.


언제 만들었는지, 언제 부모님 집에 도착했는지 그 연식을 가늠할 수 없는 성냥들이었다. 성냥이 흔한 판촉물이던 시절, 부모님 손에 들어왔을 거고 서랍에 들어가게 된 후 몇십 년이 흘러 지금 내 손에 잡힌 듯했다.


그날 밤, 성냥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섯 개피가 들어있었다. 한 개비를 꺼내 들고 화약면에 가져다 대고 힘을 주었을 뿐인데, 본격적으로 긁기도 전에 부러져버렸다. 다음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것은 긁히기는 했으나 세네 번 긁어도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여섯 개비 중 마지막 하나만 발화에 성공했다.


실망스럽지 않았다. 20년은 족히 지나 보이는 성냥갑에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 성냥을 꺼내고 마찰면에 긁는 행위 자체에 낭만이 있었다. 불을 피우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마침내 불을 피우게 되었을  폭발하는 성취감을 느꼈을 호모 사피엔스의 DNA 여전히 내게도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캔들라이터가 배송  후에도 성냥갑에 먼저 손이 갔다.


두 번째 성냥갑을 꺼냈다. 발화율은 앞선 성냥갑과 유사했다. 대여섯 개를 실패하고 나면 하나쯤 불이 붙곤 했다. 성냥갑 하나를 모두 다 써서 한 번 성공했다.


마지막 남은 세 번째 성냥갑을 꺼냈다. 한 개비를 꺼내어 벽면을 긁자 바로 불이 붙었다. 운이 좋게 멀쩡한 녀석을 가장 먼저 잡은 것 같았다.


그다음 날, 또 한 개비를 꺼냈다. 이번에도 성공이었다. 그다음도, 그 다다음도 모두 발화했다. 연이은 성공이었다. 그제야 나는 성냥갑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만약 제조사가 적혀있다면, 기억해둘 요량이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에 하얀색 바탕. 그 위엔 엽서체로 '가로수 cafe'라고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가로수 cafe 성냥갑에서 꺼낸 모든 성냥들은 불을 피워냈다. 앞선 두 성냥갑과 대조했을 때, 기적에 가까운 발화율이다. 이내 숭고함을 느꼈다. 장인의 물건이 분명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물건이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견고했다.


그냥저냥 대충 만들 수도 있었을 거다. 제조원을 기재하는 것도 아니고, 제조원을 따져가며 구매하는 물건도 아니다. 심지어 일반 소비자 대상 판매할 상품도 아닌 흔하디 흔한 판촉물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만들었다.


만든 사람이 성냥 한 개비에 쏟은 노력과 시간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을 통과해 2021년까지 살아남아 그 목적을 달성했다. 기똥차게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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