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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 놓은 저 속에서는 여전히 깊은 슬픔과 헛된 고민들이 회오리쳐 나를 흔들어대고, 그 바로 위를 스치는 세상의 차가운 바람은 끝내 나를 얼어붙게 하며 지나가곤 한다. 때로는 홀로 울 힘조차 남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몸을 접어두면, 내 깊은 속은 그제야 고요한 얼굴을 드러내어 묵직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한다. 마치 오래된 그림자처럼, 말없이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를 비추고 마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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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요 속에서 나는 문득 묻곤 한다. 나는 어쩌자고 이리도 어리석은가, 지난 시간 속에서 한 치라도 자라기나 했던가. 어린 날의 웃음은 언제 그렇게 흘러가 버려, 뒤돌아보면 손에 잡히지 않는 먼지 같은 기억으로만 남게 된 것인가. 초라한 나의 세상에 폐허처럼 흩어진 추억들은 이제 와서야 묵직한 잔해의 얼굴로 다시 나타나, 버릴 수 없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고 고집스레 나를 붙들곤 한다. 허물어져가는 돌담 같고, 물 먹은 나무토막 같고, 손끝에 닿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지난날의 조각들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걸어온 길의 일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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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잔해들은 비록 초라하고 때때로 부끄럽기까지 하지만, 내 삶을 이루어온 결들처럼 바다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조용히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으나, 파도 속을 잠시 멈춰 바라보면 결국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세웠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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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속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고, 슬픔과 고민의 회오리와 폐허가 된 추억들을 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하루를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바다의 깊은 어둠도 미약한 빛을 품어 올릴 날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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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올해 봄의 어정쩡한 자세의 봄은 뒤로하고 어느새 옷깃을 꼭꼭 여미게 되는 한겨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