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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Nov 03. 2020

도토리를 빼앗기지 않는 세상

마음이 작아질때마다 정원을 더 크게 키운다

 내게는 정원이 하나 있다.


 그 곳엔 중세시대의 유서깊은 조각상, 담쟁이 덩굴로 둘러쌓인 고풍스러운 별장, 해먹이 묶여있는 야자수와 작지만 귀여운 분수가 있다. 그 뿐인가, 이웃들은 자주 나를 파티에 초대하고, 가끔은 나도 손님 응대로 정신없지만 기분좋은 하루를 보내며, 집사 오스틴이 오늘의 임무를 잘 마치고 잠드는지 살펴야 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 정원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이 많고, 집사 오스틴을 통해 낡은 시설물을 정비하고 세심하게 관리도 해주어야 한다. 관리 방법은 간단하다. 각기 다른 종류의 과일퍼즐을 맞춰 미션을 수행하고, 수행의 대가로 별을 얻어 관리 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아, 퍼즐을 맞출 수 있는 기회는 10분에 한 개씩 주어지는 ‘하트’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      


이 정원의 이름은 ‘꿈의 정원’이고, 플레이스토어의 ‘게임코너’에서 매입했다.  

허언증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게임의 세계는 매혹적이었다. 특히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며,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롤플레잉 게임이 그랬다. 열 살, 열한 살 무렵에는 한 달 내내 군것질을 끊고 용돈을 모아 비디오가게에서 파는 게임CD를 샀고,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게임에 몰두하다 방광염에 걸린 적도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카렌(게임 속 인물)이 어떻게 될까, 바벨탑(게임 속 배경)을 어떻게 올라야 하나 고민하느라 자주자주 뒤척이곤 했다.  

   

 그러다 온라인 게임이 활성화될 무렵, 그러니까 내가 열 세살 열 네살 무렵, 나는 게임을 그만두었다. 눈코입이 조금씩 다르게 생긴 캐릭터들은 한 공간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사람들은 내 도토리를 마구 빼앗아 갔다. 나는 거적데기를 겨우 걸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금빛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초심자 패키지’를 구매하면 멋진 검과 갑옷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시절 나는 ‘한심한 폐인들’이나 게임에 돈을 쓰는 줄 알았다. 자주 모르는 사람들이 채팅을 걸어 자기네 길드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 시절 나는 얼굴 모르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납치범’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나라

 나는 이제 (아직도 익숙하진 않지만) 넷플릭스에 월 9,500원의 요금을 지불하는 의미를 알게 되고, (아직도 화들짝 놀라긴 하지만) ‘인상이 좋아보인다’며 접근하는 낯선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게임에 돈 한 푼을 안 써도 서울에 집 한 채 가질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원치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 속해 끊임없이 나를 설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실 속 집 한 채는 가질 수 없어도 화면 속 꿈의 정원은 가질 수 있고, 이 곳에서 나는 누구와도 억지로 섞이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게 설계된 세상에 존재하는 NPC들이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나는 퍼즐만 잘 맞춰주면 된다. 이 곳에는 내 도토리를 빼앗는 사람도 없고, 자신의 채팅에 대답하지 않는 이유로 우리 엄마를 욕하는 사람도 없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핸드폰 화면보다도 작게 느껴지는 날엔 화면 속 정원을 더 크게 키운다. 어떤 날엔 아주 작은 성취만으로 꽤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엔 가끔 1,200원짜리 보석패키지를 구매하기도 한다. 보석패키지 안에 있는 유료 아이템을 사용하면 몇 날 며칠을 못 깨던 스테이지도 조금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고, 그러면 기다리던 다음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화 그 자체의 수익 창출 방법

 현실에도 그런 패키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이를테면 ‘주말로 시간 이동 3회권 + 먹어도 살 안찌는 쿠폰 5회권 + 원치않는 이와의 대화 차단기능 10회권’을 패키지로 파는 것이다. 백 만원쯤 지불할 용의가 있지만 향후 백 년간 그런 일은 없겠지? 그러므로 나는 당분간 게임 속 정원을 가꾸고, 가끔 현실의 돈으로 가상의 보석을 구매하는 작은 사치에 만족해야겠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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