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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Apr 01. 2021

아빠와 이력서

내 꿈은 재벌 2세

 소파에 누워서 ‘방구석 1열’을 보며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중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직접 전화를 하는 일은 일 년에 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기에 화들짝 놀랐다. (그마저도 보통은 같이 있던 엄마의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을 때이다.) 아빠가 갑자기 다단계를 권할리도 없고, 청첩장을 준다고 만나자고 할 일은 없지만 오랜만에 걸려오는 아빠의 전화는 늘 날 긴장하게 한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빠는 대뜸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물었다. 참나, 지금 열 한시거든요.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내 컴퓨터에 있는 아빠의 이력서를 좀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지금 일하는 곳보다 가까운 곳에 T.O가 났다며 이력서를 한 번 내보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셨다. 나는 찾아보고 보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무엇보다 잘 먹고 잘 싸는 게 중요한데, 늘 잘 먹는 것 같긴 하니 똥을 잘 싸라고 했다.



 그 유명한 58년 개띠, 올해 예순 네 살인 아빠는 아직도 일을 하신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1977년부터 무려 지금까지 말이다. 건설회사의 특성상 외진 지역으로의 발령이 잦았고, 덕분에 나는 세 개의 초등학교, 두 개의 중학교를 다녔다. 그 와중에도 아빠는 주말에만 집에 방문하다시피 했기에, 숫기 없던 어린 시절의 난 아빠만 보면 울었다고 한다. 저 아저씨 누군데 자꾸 우리 집에 오냐고. 집주인인 아빠는 아마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가 명절에 가져오는 선물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 한 두 해씩 공백도 생겨나기 시작했고, 소파에 누워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괜찮은 채용기회가 생겼고, 아빠는 집 앞 사진관에서 갓 찍은 증명사진을 내밀며 내게 이력서를 써달라고 했다. 요즘 이런 거 대리작성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 거 아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나는 아빠가 손으로 적어준 이력서를 워드에 옮겨 적었다. 아빠가 적어준 종이에는 그동안 옮겨다닌 수 십 개의 현장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흔히들 한 직장을 평생 다닌 사람이 대단하다고들 하고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빠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작 세네 번의 전학에도 적응하는 동안은 전쟁 같은 시간을 치루어야 했는데, 안 그래도 성격도 안 좋은 양반이 매번 새로운 곳에서 얼마나 낯선 밤을 보냈을까. 가족들을 한 달 동안 볼 수 없었을 때, 지금의 나보다 고작 열 살 많았던 그 남자는 작은 방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성격이 이렇게 괴팍해진 게 분명해’라고 생각하며 두 페이지 넘는 이력서를 가득 채워 아빠의 메일로 보냈다. 메일 주소는 아직도 내가 초등학교 때 만들어 준 그대로였다.     


 이력서를 옮겨 적다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만약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언제로 돌아갈 거야?” 아빠는 니들(나와 동생) 크는 거 보면서 한창 일하던 시절이라고 대답했다. 시간도, 여유도, 취미도, 하다못해 가족을 만날 시간도 없었으면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아빠는 그래도 그 시절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일 하는 게 재밌을 수가 있냐고 되묻는 내게 아빠는 “너도 한 번 놀아봐라”라고 답했다. 난 아직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짜릿한데.     



 그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해서 보내준 게 몇 년 전인데 그 새 두 줄이 더 생겼다. 여전히 그대로인 아빠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본문에 ‘취뽀 기원’이라고 적어 메일로 보냈다. 내 꿈은 재벌 2세인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서 내가 지금 꿈을 못 이루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재벌 아빠가 꿈이라며 나보고 노오력을 하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일 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라는 어딘가 사형선고 같은 말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빠 힘내, 나 아직 꿈 포기 안 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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