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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Dec 26. 2023

수영하는 워킹맘 -2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1편에 이어)

간만의 자유에 너무 취해서 적정 행동의 기준점을 넘어버리면 이런 결과가 초래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것 또한 신선한 기분이었다. 운동복 대신 재킷과 정장 슬랙스를 입고, 운동화가 아닌 굽 낮은 단화를 신고 난생처음 전기자전거로 수영장 앞까지 이동당하는(?) 일을 겪는 것도 나름 신선한 경험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오랜만에 되찾은 나만의 점심시간이 너무도 신나는데! 전기자전거 따위가 나를 당황하게 할 순 없었다.

 아이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복직 후 나는 나의 삶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업무시간에 내 이름이 불리고, 책상 하나만큼의 작은 내 공간에서 내 이름으로 된 ppt파일을 만들고 일을 하는 것, 휴게시간에는 휴식을 취하고,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책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서 '싫어싫어 퇴사퇴사' 노래를 부르던 회사에서 찾아낸 안정감이라니. 인정하기 싫었으나 인정하지 않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평온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도 숭고하고 의미 있으며 가치 있는 일이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키우고, 먹이고, 살리는 일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인 것만으로 가득한 내 삶이 멋졌고, 대단했고, 기특했다.

 그러나 1500원을 내고 10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그날의 오후, 나는 내가 엄마인 것 또한 여러 가지의 나 중에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 때 밥을 먹고 싶기도 하고, 내 이름으로 불리고 싶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싶기도 하고, 다시 수영을 시작하고 싶기도 했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섬집아기"를 불러주다가 괜히 울컥한 적이 있다. 누군가 섬집아기는 워킹맘의 비애를 담은 곡이라 했는데 가사를 살펴보면 정말 그렇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봅니다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이 얼마나 워킹맘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인지. 모든 단어 단어가 슬프다. 가계를 위해 아기를 집에 두고 굴을 따러 가야 하는 엄마의 심정,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보다 친구 하나 없이 파도 소리를 듣고 잠이 드는 아이의 외로움. '이건 워킹맘들이 마음 아프라고, 죄책감 느끼라고 만든 노래야!!'라며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도, 나는 가끔 호르몬이 미쳐 날뛰는 날은 꽤나 울컥하곤 했었다.

그럴 땐 태안으로 이사를 간 친구를 떠올렸다. 친구가 이사를 가서 새로 들인 취미는 놀랍게도 '조개 캐기'였다. 주말마다 갯벌에 장화를 신고 가서 바지락, 맛조개 등 조개를 캐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고 했다. 먹으려고 가 아니라, 그냥 조개를 '캐는' 그 행위가 너무도 재밌다며, 당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섬집아기 노래 속 굴을 따러 간 엄마는 사실 워킹맘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즐기러 간 건지도 모른다. 그날은 옆 집 동호 엄마, 우진이 엄마와 함께하는 굴 따러 가는 걸 사랑하는 모임 (줄여서 굴사모) 정모 날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럼, 엄마도 취미생활이라는 걸 할 수가 있지. 그것도 엄마의 삶이고, 하루쯤 혼자 잠든 아이도 그것을 이해해 줄 것이다. 억지 같지만, 억지가 맞다. (그러나 애초에 혼자 잠드는 아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애초에 노래 자체가 억지인 셈이다. 그러니 억지인 노래에 마음 쓰며 괜한 죄책감을 더하지 말기로 다짐해 본다.)

 앞으로 많은 역할 갈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야근을 통해 납기를 맞추어야 하는 보고서와 엄마를 필요로 하는 아이 사이에서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고뇌해야 할까. 정답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까지 회사에서 내 몫을 다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달려가서 아이를 꼭 안아주고, 또 그 와중에 기회가 될 때마다 자전거를 타러 뛰쳐나가거나, 수영장으로 향하는 수밖에.

 회사 퇴근과 동시에 육아로 출근하는 고된 삶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기꺼이 내 하루를 통으로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날들의 연속이다. 퇴근 후 시간을 분과 초 단위로 쪼개면, 아이의 하원까지 약 30분 정도 시간이 생긴다. 오늘도 30분 동안 짧고 굵고 빡세게 수영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하는 오늘 하루 Round2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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