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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호 Mar 19. 2019

댄스 록 하나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

The Specials, [Encore] (2019)

 언젠가 스페셜스(The Specials)는 음악사를 사로잡은 적이 있다. 전성기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 밴드의 흥행은 하나의 문화 운동으로 연결됐다. 자신들의 스타일을, 레이블을 칭하고자 만든 투톤이라는 어휘는 곧 장르의 학명으로 등극했다. 이들이 가진 음악적 특수성과 국지성에도 불구하고 밴드가 만든 시대는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은 대를 이어가며 지금까지도 이들을 신봉하고 있다. 그래서 [Encore]는 발매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 감응을 압도해버린다. 이를테면 2008년 밴드 재결성 이후 첫 앨범이라는 점, 2001년에 발매한 전작 [Conquering Ruler] 이후 18년 만의 신작이라는 점은 그 자체로 기대를 배태하기 충분하다. 또 1970년대 영국의 스카 리바이벌과 투톤 무브먼트, 스페셜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데뷔 앨범 [The Specials]의 발매 40주년에 나왔다는 사실도 감응에 개입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1981년의 싱글 ‘Ghost Town’ 이후 팀을 완전히 떠났던 리드 보컬리스트 테리 홀(Terry Hall)이 복귀했다는 뉴스 앞에선 수용자로서 작품과의 수평적인 긴장을 포기하겠다는 어떠한 증상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Encore]는 큰 공로를 가진, 오래된 밴드의 의미 가득한 복귀작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볼 차례다. 긴 시간, 복잡한 사연 끝에 나온 작품의 사운드를 다음 몇 트랙을 통해 요약해보자. 우선 [Encore]에는 그루브가 가득하다. 펑크와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의 교두보에서 리듬의 다양성을 탐구하고 동세대 이국의 음악을 취한 이들답게 음반의 열 트랙에는 여유롭고도 섬세한 오프 비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 모양새는 각양각색이기도 하다. 비단 ‘Embarrassed by You’와 ‘Vote For Me’, 발렌타인스(The Valentines)의 ‘Guns Fever (Blam Blam Fever)’를 재해석한 ‘Blam Blam Fever’, 프린스 버스터(Prince Buster)의 ‘10 Commandments of Man’에서 힌트를 찾은 ‘10 Commandments’ 등이 지닌 스캥크 리듬들뿐만이 아니다. 작품에는 이퀄스(The Equals)의 1970년 곡 ‘Black Skin Blue Eyed Boys’를 다시 다루며 동명의 첫 트랙과 두 번째 트랙 ‘B.L.M’에 이식해놓은 소울 펑크의 리듬이 있고, 테리 홀과 린발 골딩(Lynval Golding)이 펀 보이 쓰리(Fun Boy Three)를 결성해 내놓은 1981년의 첫 싱글 ‘The Lunatics (Have Taken Over the Asylum)’을 ‘The Lunatics’로 변형하며 재확인한 중남미 풍의 사운드 정취 또한 있다. 돌이켜보면 이들은 과거에 스카를 몹시 사랑하면서도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의 갖은 변용을 채택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은 바 있다. 위의 트랙들은 그룹의 오랜 잡식성을 상기할 지표라 하겠다.


 이어 ‘Vote For Me’를 보자. 여러 단화음을 등차에 따라 배치한 인트로로 시작해, 느긋한 스카 비트, 쓰리 코드 중심의 버스 전개, 사방으로 마이너 스케일을 음산하게 전파하는 울림 큰 사운드 공간,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스트링을 섞어 만든 이 곡은 밴드의 오래된 명작이자 대담한 사운드 콜라주인 ‘Ghost Town’과 유사한 통사를 지녔다. 독특한 컬러와 여러 사운드를 유머러스하게 결합하는 실험성의 유전자는 긴 잠복 상태를 거쳐 오늘날 이렇게 다시 발현했다. 또 ‘We Sell Hope’를 보자. 넉넉하게 조성한 사운드스케이프와 치밀하게 유지되는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곡은 몽환적인 기타 리프와 보컬 코러스, 큼지막한 스트링과 신시사이저를 결합해 묘한 장면을 재차 연출한다. ‘10 Commandments’는 어떠한가. 사피야 칸(Saffiyah Khan)의 계시적인 보컬 퍼포먼스 너머에서 갖은 사운드 장치가 부유하도록 만드는 연출은 오래전 ‘Man at C&a’, ‘International Jet Set’ 등에서 보였던 사운드의 실험적인 다각화와도 닮았다. ‘10 Commandments’의 사운드를 이야기한 김에 이 곡을 지배하는 보컬의 연설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자. 이 주술적이면서도 선언적인 보컬은 언젠가 질 스콧헤론(Gil Scott-Heron)의 스포큰 워드 식 가창에서 자주 만났던 언사다. 이러한 가창을 ‘10 Commandments’만 아니라 ‘B.L.M’에도 설치한 접근 방식 역시 밴드의 갖은 시도를 방증한다.


The Specials - Vote For Me (Lyric Video)


 당연하게도 스페셜스의 작업은 일련의 잡식성이나 실험성을 보이는 사업뿐 아니라 자신들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사운드를 확인하는 일에도 충실하다. 댄스의 장르적 변주가 곳곳에 존재하나 러닝 타임 대부분을 이끄는 리듬은 역시 스카에 기반한다. 밴드는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스카 리듬에 대다수의 트랙을 할당했을 뿐 아니라 스카의 오래된 모델인 프린스 버스터와 발렌타인스에게 유산을 요청하고 영국 스카의 또 다른 소산인 펀 보이 쓰리의 이력을 재확인하기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현대식 말끔한 음향 필터 너머로는 투톤 시대가 사랑했던 사운드 모듈도 함께 마련했다. 겹을 이루는 보컬 코러스, 부피감 있게 쌓인 브라스와 스트링, 다채로운 퍼커션이 이 모듈의 구성 성분이고 이들에게서 긴 울림과 입체적인 잔향을 이끌어내는 몽롱한 사운드스케이프가 그 배경이다. 그러니 [Encore]에는 스페셜스의 앨범으로서 빛을 발하는 지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밴드의 새로운 창작은 자신들의 과거를 적절히 내포한다. 그루브의 양식을 넉넉히 끌어오고 치밀한 방식으로 사운드를 설계하는 일은 이들에게서 익히 보아온 것이다. 예의 여러 성질이 결합하고 분광하는 이 음반은 [More Specials] 이후의, 그리고 [In the Studio] 이후의 스페셜스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다. 적어도 [Encore]는 제리 대머스(Jerry Dammers)의 탈퇴 이후 최고의 작품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Encore]를 조금 박정하게 대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앨범을 살핀다. 리듬의 여러 변형과 풍성한 편곡 규모, 공간감 있는 프로듀싱, 이따금씩 산발하는 독특한 세부장치를 갖추고 있음에도 음반은 한편 꽤나 정적이기도 하다. 스페셜스는 예와 달리 크게,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이에 몇 증거를 제시한다. 우선 코러스가 무력하게 지나가거나 코러스가 아예 없다는 특성에서 역동성의 결핍을 의심했다. 이들의 본연에는 다이내믹하고도 다채로운 리듬을 보컬 파트가 계속 포섭해나가며 캐치한 코러스를 만드는 움직임이 있었건만, 어째선지 작품에는 그러한 작동이 자주 일지 않는다. 때로는 선율을 성기게 직조하는 스카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음반 전반에서 발생하는 후렴의 약화 혹은 잦은 부재는 에너지의 고조와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다음 증거라 할 것은 절제된 편곡이다. 곡 저마다가 가진 장치들은 다채로운 편성에 기반하나, 무거운 과잉과 지나친 중첩을 의도적으로 피하듯 상당히 단속적으로 등장한다. ‘We Sell Hope’와 ‘10 Commandments’의 막바지 정도를 제외하면 그 구성 성분들은 때마다 강하게 모습을 내보이고는 서로 강력히 결속되지 않은 채로 공허하게 흩어진다. 그 사이에 생기는 여백은 공간 너른 사운드스케이프로 인해 더 부각된다. 좀처럼 들뜨지 않은 가운데 마이너 스케일 위주로 형성한 음반 전반의 선율 역시 정적인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히기까지 한다. 이러한 정리를 통해 말하자면 [Encore]는 때로 너무도 비어있고 대단히 흥겹지도 않으며 이따금은 침잠한다.


 예를 들어 [Encore]에서의 분명하고 강렬한 코러스는 ‘Black Skin Blue Eyed Boys’, ‘Blam Blam Fever’, ‘The Lunatics’와 같은 리메이크 곡들에 편중돼있다. 여기에 경쾌한 선율의 후렴을 곡 도입부에서부터 내미는 ‘Embarrassed by You’까지 제외하면 동적인 코러스와 훅을 가진 곡은 이제 거진 존재하지 않는다. ‘B.L.M’의 후렴은 장중한 연설에 짓눌렸으며 ‘10 Commandments’는 아예 후렴구를 생략했고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은 코러스 구간을 목소리가 아닌 다른 파트가 대무하도록 만들었다. ‘Vote For Me’를 보자. 차분하게 흘러가는 곡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용해되는 식으로 코러스는 구성됐다. 해당 구간을 지나가며 스트링과 건반이 가세하나 이들의 세기 역시 곡에 격류를 일으킬 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Breaking Point’의 후렴도 이와 비슷한 구조다. 보컬 더블링으로 후렴의 존재를 강조함에도 곡 전반의 단조로운 음 배열로 인해 그 변별력이 결코 상당하지 않다. 게다가 명확하고도 캐치한 코러스 라인을 가진 옛 소울 펑크 싱글과 클래식 스카 넘버, 뉴웨이브 시대의 산물은 트랙리스트에서 연속하지 않고 산개한 관계로 후렴의 역동성은 작품 전반에서 쉽게 누적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Encore]는 밋밋한 후렴의 연속이다.


 이번에는 편곡의 절제성에 맞춰 음반을 보자. ‘The Lunatics’가 첫 발췌곡이다. 원곡에서 러닝 타임 내내 긴장을 조성했던 퍼커션의 부담스러운 잔향과 음산한 보컬 코러스는 [Encore]에 들어오며 자취를 감췄다. 조용한 음장을 한참 가로지른 뒤, 아득한 스트링과 기타 리프, 라틴 풍의 트롬본, 즉흥적인 피아노가 차례로 쌓이는 곡 중후반부에 이르러서야 ‘The Lunatics’가 본래 가진 음산함은 효력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Breaking Point’도 다시 언급해야 한다. 음이 단조롭게 배열된 성분은 단지 후렴구뿐만이 아니다. 드럼 비트와 베이스 라인, 기타 배킹, 뮤트 브라스 섹션 등 구성 성분 전반이 곡의 간단한 리듬에 의지한 채 단순한 선율만을 내뱉는다. 그 가운데서 진행의 다변화를 꾀하는 기타 독주마저도 미니멀한 곡에 어울리도록 클래식 기타로 연주되니 강렬한 사운드의 등장은 차라리 전무하다고 하겠다. 선율과 편성이 더욱 폭넓을 수 있음에도 곡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일정 수준 이상의 사운드 증량을 회피하는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와 ‘We Sell Hope’는 그야말로 절제의 현장일 테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서는 음반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으리라. 경쾌한 것, 과도한 것, 강렬한 것이 밀려나고 정적인, 어쩐지 정적인 것들이 남아서 댄스 리듬을 포섭해버린 작품이라고.


The Specials - 10 Commandments (Lyric Video)


 사운드가 잃은 에너지, 역동성은 다행히 텍스트로 환원된다. 오래전부터 텍스트를 노기의 매개로 사용해온 스페셜스가 작금에서 제재를 빌리지 않을 리 없다. 세계 곳곳에서 불거지는 인종 차별은 인종 간의 화합을 소원하는 이퀄스의 1970년 곡을 다시 찾게 했고, 린발 골딩으로 하여금 ‘B.L.M(Black Lives Matter)’라는 표제 아래에서 세대에 걸친 흑인의 갖은 피해상을 기나긴 연설로 내뱉도록 만들었다. 또 여성 인권 문제로부터는 프린스 버스터의 ‘10 Commandments of Man’을 재고할 계제를 찾았다. 이어 밴드는 운동가 사피야 칸의 피처링과 함께, 남성을 향해 순종하고 헌신할 것을 여성에 강요하는 옛 노래 속 십계를 냉소적으로 파쇄하고는 여성을 위한 새 시대의 십계와 대담한 전언을 도출했다. 더불어 이들의 날 선 문제의식은 불신을 낳았으니, 매 선거철에 맞춰 사방에서 쏟아진 공수표를 주워다 ‘Vote For Me’라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만들었고 청년들의 방종과 방만을 포착해 ‘Eabarrassed by You’라는, 후대를 향한 불신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발렌타인스의 ‘Guns Fever (Blam Blam Fever)’를 차용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곡 발매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수많은 경험과 경고가 누적됐음에도, 도무지 끊일 줄 모르는 총기 난사 사고에 대한 공포가 바로 여기 내리 앉아있다.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에서 테리 홀이 고백하는 아동 학대 피해, 우울증, 약물 중독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테리 홀이 예술로 구체화한 3절짜리 가사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사는 한 연약한 개별자가 인생에 걸쳐 기록한 개인사이기도 하고 보편적으로도 널리 있을 법한 투쟁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 ‘We Sell Hope’가 내뱉는 평화 추구의 제언까지. 이 앨범은 사회 속 여러 분노라는 대주제로 시작해 진행되고 또 완결된다.


 긴 기간 벼려온 연륜은 적확하게 시대를 조명하고 원숙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늙지 않는 저항성은 냉소적인 수사와 혁명적인 선언을 곳곳에 배치한다. 이렇다 할 은유나 우회 없이 경험의 단편만을 나열함으로써 ‘B.L.M’과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는 다큐멘터리로 완벽하게 작용하는 데다 ‘10 Commandments’는 날카로운 현실 포착과 비판을 동원해 위대한 선언과 새로운 윤리를 위한 장으로 거듭난다. ‘We Sell Hope’를 보라. 언젠가 피트 시거(Pete Seeger)가 부르고 그레이하운드(Greyhound)와 쓰리 독 나이트(Three Dog Night)가 계승했던 ‘Black and White’ 속 화합의 메시지는 ‘We Sell Hope’ 앞에서는 구시대의 산물이 될 테다. “검은색이 있고 흰색도 있다”는 메시지로 옛 노래가 전제한 차별지(差別智)는 스페셜스가 외치는 “검은색이 흰색이고, 흰색이 검은색이다”라는 단언 앞에서는 이제 무효하다. 이 아지프로는 단연 정언적이고 그래서 번혁적이기까지 하다. 커버곡을 고름에 있어 ‘Black Skin Blue Eyed Boys’와 ‘Guns Fever (Blam Blam Fever)’를 집어낸 선별은 또 어떠한가. 밴드가 다시 꺼내든 과거의 텍스트는 일찌감치 훌륭함을 인정받았고 이들을 소환해야만 하는 당위성은 지금도 충분하다. 이 역시 [Encore]와 밴드를 긍정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러나 역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동력을 일부 잃은 사운드다. 이 문제는 이제 사운드의 텍스트의 결합 형편으로 나아간다. 음악과 문자가 이어지는 양태를 기준으로 스페셜스의 지난 음악을 논한다면 모순적이라고 칭할 수 있겠고, 동시에 정반대로 조응적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다. 요컨대, 노기와 냉소로 점철되는 텍스트의 내용은 활달한 댄스 사운드와 배치(背馳)되는 모양새로 얽혔지마는, 한편으로 그 강렬한 세기는 역동적인 사운드와 훌륭히 상응하는 모양새로 섞이기도 했다. 이 양가성은 분명 스페셜스의 음악 그 가장 깊은 층위에서 대단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가성은 [Encore]에서도 원활히 작동하는가. 다음과 같이 답하겠다. 음악과 문자 간에 대비라 할 것은 있으나 모순에 진입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고, 합일이 일어난다고 하기엔 텍스트의 선동적인 에너지를 정적인 사운드가 온전히 품어내지 못 한다. ‘Vote For Me’를 인용한다. 정치를 향한 불신임을 담아내는 데 있어 을씨년스러운 앰비언스와 단순한 스카 비트, 과장되지 않은 퍼포먼스가 결코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만, 일말의 동요 없는 사운드가 전언의 위력을 십분 발휘한다고 하기엔 역시 의문이 따른다. ‘The Lunatics’도 다시 가져오자. 최초의 긴장감 있는 사운드를 해체하고 남은 평이한 질료가 곡 본연의 편집증적 테마를 원곡 이상으로 잘 부각한다고 언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혹은, 혁명적인 텍스트를 리듬의 단순한 육박에만 의존하도록 만든 ‘Breaking Point’를 두고는 설득력 있는 곡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르포르타주라 할 ‘B.L.M’의 장구한 기록에는 어쩌면 강렬한 코러스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긴 시간의 체험이 텍스트의 주된 내용이니 되려 밋밋한 후렴도 또한 적합하다 하겠다. 비슷한 형식을 가진 ‘10 Commandments’도 마찬가지다. 열정적인 연설로 토해내는 선언의 흐름을 구태여 끊을 필요도 없거니와, 이 형식은 프린스 버스터의 십계에 사용된 텍스트 구성 방식을 모방한 것이기에 후렴구가 들어갈 여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과 ‘We Sell Hope’는 [Encore]에서 가장 훌륭한 결과물로 꼽힐만하기까지 하다. 큰 소동이나 캐치한 코러스 혹은 변칙적인 진행 없이, 혼합박자 위에서 절제를 유지하는 리듬, 긴장을 배태한 키보드와 브라스, 스트링 위주로 구성한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의 연출은 테리 홀의 정신적 외상을 읊조리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배경을 제공하며, 후렴 구간 때마다 후경의 규모를 점차 키워가는 ‘We Sell Hope’의 사운드는 밋밋한 멜로디로 반복되는 코러스를 재차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적인 사운드의 순기능은 단 이 정도까지다. 적극성을, 역동성을 상실한 사운드가 일정 수준의 정합성을 담보할 순 있을지언정 예와 같은 매혹적인 양가성을 제공하기는 어렵다. 작품을 박정하게 보고 무미함을 감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음악과 문자의 결합 차원에서 일어나는 양가성의 결여만이 문제는 아니겠다. 반절이 넘는 곡들은 대담하게 시작되고 허전하게 러닝 타임을 이어가다 막을 내린다. 곡들은 이따금씩 동력을 쌓다가도 이를 허무하게 소진하며 결핍을 노출한다. 평평하게 흐르는 댄스 사운드의 누적은 분명 트랙리스트상의 흐름이라는 음반의 표면적인 층위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이는 예감 가능한 침잠의 연속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프로듀싱과 폭넓은 사운드 편성, 여러 리듬 양식, 훌륭한 텍스트 등 자신들이 과거에 가졌던 성분을 대다수 갖추고 있음에도 부족한 단 하나, 그러니까 사운드 전반에 놓인 미약성 혹은 상실된 역동성이라 할 것이 결손으로서 너무도 크다. 그 역동성은 필시 언젠가 젊은 날의 스페셜스가 보였던 음악과 캐릭터, 성과, 권위를 이루는 대단한 본질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Encore]는 잘 만든 음반임에도, 끝내 중요한 하나는 쥐지 못 한 음반이겠다. 오랜만에 무대 위로 올라선 밴드의 복귀작이라는, 또는 원숙미가 가득한 댄스 음반이라는, 여전히 다채로운 창작력의 소산이라는 의미들을 붙여 작품을 긍정적인 결과로 눙칠 수 있겠지마는, 완벽하게 긍정하는 것만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Encore]는 큰 결핍이 도사리는 음반이기도 하다.


 스페셜스는 새로움을 머금고 돌아온 밴드이면서도, 분명 말년에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그룹이기도 하다. 우리는 말년의 예술가들을 다음의 두 경우로 구획할 수 있을 테다. 이를테면 그 자신으로서 엄청나게 농익어가는 예술가가 하나의 경우겠고, 무서울 정도로 지난날의 자신을 파괴해가는 예술가가 다른 하나의 경우겠다. 그리고 이 두 경우를 분류하는 변별적 자질은 정체성이다. 예컨대 전자는 과거에 정립된 정체성이 시간의 집적에 따라 숙성하는 것이다. 지난한 교리에 평생을 순교해 온 구도자의 움직임이 이와 비슷하리라. 후자는 어떠한가. 정체성을 스스로 쇄파해가며 예의 자신을 허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주목한 베토벤의 말년의 양식과도 같다. 그렇다면 [Encore]에는 어떠한 말년이 있는가. 가사에 어린 의식과 세밀한 사운드 디자인, 탁월한 선곡은 스페셜스의 정체성이 누적한 결과다. 여기에는 단연 지단한 연륜이 깔려있다 . 그러나 그 가운데 이들의 음악에서 큰 축을 담당했던 역동성이 탈락했다. 이에 정체성이 완벽히 숙성하는 일은 다소 어려워졌다. 이제 반대편에서 보자. [Encore]는 완전한 이탈의 산물인가. 또한 그렇지도 않다. 몇 실험적인 터치가 있다더라도 본연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음반의 중반에 이르러 정적인 그루브는 심지어 재차 정형화되기까지 했다.


 불행히도 앨범의 몇몇 대목은 되려 지난날의 업적, 공로와 같은 과거 제반사들을 더욱 위력적으로 만든다. 왕년의 아우라가 지독한 탓일까. 이 감상문은 스페셜스의 과거에 기대는 어떠한 기대로부터 출발했고 결국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대는 사실 새 작품으로서의 [Encore]를 너무도 불공평한 지점에 놓이게 한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신보에게 비교 대상이 선재한다는 것은 분명 부당하다. 그럼 잠시 위대한 밴드의 작품이라는 부당한 조건을 제하고 보자. 그래. 차라리 신진 예술가의 작품이라 해보자. 음악 전면에서 일어나는 역동성의 결핍은 이제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결과일까. [Encore]가 어느 쪽이었든 나는 그러나 이 글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갈무리했을 테다. 많은 것을 능란하게 늘여놓으면서도 그 역동성이 모자라 음반은 적잖이 가라앉는다.


-수록곡-

1. Black Skin Blue Eyed Boys

2. B.L.M

3. Vote For Me

4. The Lunatics

5. Breaking Point

6. Blam Blam Fever

7. 10 Commandments

8. Embarrassed by You

9. The Life And Times (Of a Man Called Depression)

10. We Sell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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