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을 전 연인에게 할 때는 얼마나 쓰라릴까. 내가 그리웠던 게 아니라 그저 필요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경유(이진욱)에게 단연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유정(고현정)이다. 둘은 함께 작가를 꿈꿨지만 유정만 등단했다. 경유는 1년전부터 글을 안 쓴다. 동거하던 여자친구 현지(류현경)는 경유 몰래 방을 빼고 연락을 끊었다. 빈털털이가 된 경유는 대리운전을 한다. 우연히 재회한 유정은 그 손님이었다.
초라한 처지로 전 연인을 마주하고, 돈까지 받는 상황이 경유에겐 너무나 아프다. 그래서 없는 돈에 술까지 마시고 얹혀 사는 친구 부정(서현우)의 집 앞에서 행패. 사라진 여자친구는 직장까지 바꿔 연락할 길이 전혀 없다. 이때 유정은 경유에게 먼저 전화하고,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준다. 문제는 이 호의의 배경에 마감기한을 훌쩍 넘긴 청탁 원고이 있었다는 거다.
유경은 경유에게 그가 예전에 썼던 원고를 자기가 발표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꾸역꾸역 참아가며 그렇게 하라던 경유에게 유경의 결정타는 '어차피 발표도 안 된 글'. 내 글 한편 세상에 보이지 못해서 작가를 포기한 경유에게, 유경은 '어차피'라는 자기방어적인 부사로 상대의 상처를 헤집는다. "어차피 발표 못 한건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경유는 폭발한다.
동물원에서 도망쳐나온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 그것도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이다. 그런 유정이 경유에게 "호랑이 조심해"라고 말했으니 이건 이 영화의 주제를 명확히 짚는다. 진짜 무서운 거, 사람을 헤치는 위험한 게 뭔지. 경유를 배신한 건 유정뿐만이 아니다. 경유를 홀연히 떠난 현지, 이제 곧 결혼할거라며 집에서 나가달라는 부정까지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뛰어난 건 인물들이 입체적이란 거다. 이기적이라고 욕하기엔 어쩔 수 없이 자기 생존이 급한, 각자의 서사가 드러난다. 재능은 없는데 글은 써야 하고, 한 줄도 안 나오니 매일 술바람에 외로운 처지인 유정. 무능한데다 결혼까지 주저하는 연인과는 미래가 없다고 느꼈을 현지. 무슨 일인지 말도 안 하며 재워달라는 친구에게 결혼 소식을 알려야 하는 부정.
경유 입장에선 서럽겠지만 인간은 원래 다 이기적인 존재. 그러니까 진짜 슬픈 건 이게 경유의 현실이라는 거다.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기댈 곳 없는 현실. 오롯이 경유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할 삶 말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은 사실 경유가 마주한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걸 다들 알아서 영화 <보희와 녹양> 속 대사처럼 어른은 조금씩 다 슬픈 게 아닐까.
영화의 엔딩 즈음, 경유는 길 위에 서있다. 여전히 현지와는 연락이 안 되고, 유정의 전화는 경유가 받지 않는다. 부정에겐 "자리 잡으면 연락"한다고 했다. 이제 전화 올 곳도, 할 곳도 없는, 혼자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경유는 이제 글을 쓴다. 그 짧은 글에는 호랑이가 두 마리 나온다. 우리를 탈출한 호랑이와 혼자 남아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먹는 호랑이. 후자는 자기가 혼자인지도 모른다. 누가 경유이고, 유정일까? 초라할지언정 우리에서 도망쳐 나오긴 해야 겨울 손님도 맞을 게 아닌가. 그 겨울 손님이 자주, 많이 아프게 하더라도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겨울을 힘껏 살아내길 호랑이가 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