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모레면 00살이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쯤, 하는 말입니다. 내일이면 내년이고 내일모레면 내후년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내일모레면 쉰이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 대에서 이십 대로 넘어갈 때는 마냥 좋았습니다. 성인이 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요. 그때는 그에 따른 책임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초콜릿을 먹으면서 이가 상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넘어갈 때는 뭔가 묵직함이 느껴졌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도 있으니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을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사십 대로 넘어갈 때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사십 대를 보내는 많은 사람이 그러더군요. “앞에 3자하고 4자는 천지 차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작 1년 차이인데 뭘 그렇게까지 겁을 주냐는 거였죠. 사십 대가 돼서야 알았습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핸드폰 수명이 2년이 되면, 배터리 수명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요. 딱 그 꼴이었습니다. 갑자기 말이죠. 핸드폰 배터리 수명과 함께 나의 체력도 떨어졌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 몸이 왜 이러지? 예전 같지 않네. 좀 무리했나?’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요. 이 느낌이 반복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운동을 좀 해야겠네.’ 이것 말고는 다짐할 게 없었습니다.
내일모레면, 앞자리가 ‘5’ 자로 바뀝니다.
만으로 따지면, 일 년 하고 두 달 정도가 남은 거네요. 사십 대로 넘어갈 때와는 조금 더 다른 느낌이 몰려왔습니다. 처음으로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거죠.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고, 정년도 연장된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100세 시대가 현실이 되었다는 말인데요. 오십을 맞이한 분들에게 농담으로 던졌던, 반백이 되는 겁니다. 아직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진 않은 거지요. 하지만 느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십하고 오십은 느낌이 다릅니다.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나이 느낌이라는 게 있습니다.
‘곧, 쉰이네.’
이 생각은 지금으로부터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생애 처음의 기억부터 유년 시절 그리고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군대에서 보낸 시간도 여러 사건(?)으로 연결돼서 어제 일처럼 떠올랐습니다. 결혼하고 아등바등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년을 넘어섰는데요. 그 세월 안에 담긴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인생을 줄거리로 떠올리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이제 와닿지 않습니다. 50년의 세월을 한두 시간 만에 돌아봤으니 말이죠.
‘그냥 생각으로만 두긴 아까운데?’
개인의 역사를 그냥 그런 가보네, 하면서 흘려보내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인생은 아니지만, 참 많은 경험과 생각이 버무려진, 나름대로 알찬 인생이었으니까요. ‘쉰’이라는 단어가 숙제를 던지는 듯했습니다. ‘그래!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한번 정리해 보자.’ 어떤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삶을 돌아보는 것, 이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를 붙이자면, ‘쉰’을 맞이했거나 곧 맞이할 분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묻는다면, 글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삶이니까요.
숙제에 대한 답을 이렇게 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데요. 지금은 군대 시기를 쓰고 있네요. 아직 써야 할 세월이 더 많지만, 쓰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감사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어둠에 갇혀 감사할 일을 더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니, 은총이어라!”라는 말이 실감 납니다. 이 작업의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 어둠이 드리워졌지만, 그 뒤에는 빛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빛이 없는 그림자는 없다는 말이 있죠? 딱 그겁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 감사의 의미라 여겨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