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의견은 항상 옳은가?”
이런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의견에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는데요. 같은 현상을 보고 다른 의견을 냅니다. 때가 그렇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해지는 거죠. 둘 중 하나의 의견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의 의견은 버려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병원에서 이런 상황을 경험하곤 하는데요. 정말 뭐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적으로 누가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한 선택이 맞고 버린 선택이 틀리길 바랄 뿐이죠.
몇 달 전, 심하게 열이 오른 적이 있습니다.
‘몸살인가?’ 일 년에 한 번쯤 심하게 몸살을 앓기에 그런 것으로 여겼습니다. 병원에서도 단순 몸살이라고 하면서 약을 처방해 줬습니다. 이틀 정도가 지나면서, 연례행사로 치르던 몸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루 이틀 약 먹고 심하게 앓고 나면 개운해지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는 꼼짝도 하지 못할 것처럼 아픈데, 약 먹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졌습니다.
체온이 말해줬습니다.
집에서 체온을 재면 40도 가까이 올랐는데, 출근하고 재면 37도 아래로 내려갔으니까요. 이런 날이 몇 번 반복되니, 다른 무언가가 있겠다고 짐작했습니다. 또 다른 증상이 하나 있었는데요. 왼쪽 정강이 쪽이 심상치 않다는 거였습니다. 양말을 벗으면 자국이 남을 정도로 부어있었고 검게 변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졌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형외과로 갔습니다.
몸살과는 별개로 생각했습니다. 정강이가 붓는 것과 몸살의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진료를 받으면서 몸살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종아리가 부은 이유는,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세균이 침투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피부를 통해 세균이 들어왔다는 거죠. 그러면서 의외의 말도 해주었습니다. “세균이 침투했기 때문에, 열이 오른 것일 수도 있어요.” 별개로 여겼던 정형외과 증상으로, 열이 났을 수 있다는 거죠. 몸에 세균이 들어오면 열이 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약을 처방받고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살도 정강이 부기도 나아졌습니다.
몸살을 잡아서 정강이의 부기가 빠졌는지, 정강이의 세균을 치료해서 몸살이 나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의견에 더 마음이 간 건 사실입니다. 단순 몸살로 보기에는 몸 상태가 기존과 달랐으니까요. 내과 선생님께 정강이 증상을 말했다면, 비슷한 의견을 주셨을 수도 있겠지만, 전문가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과 의사는 내과 지식으로, 정형외과 의사는 정형외과 지식으로. 당연하겠지만 말이죠.
전문가 의견에 대한 신뢰는, 어릴 때도 깨진 적이 있었습니다.
X세대는 아마도 기억날 겁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입니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과 패션 등을 선보이며 나타났는데요. 한 프로그램에서, 이 신인들에게 최고의 악담을 내놓았습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가능성 유무를 따지는 정도가 아니라, 확정이었죠. 하지만 어땠나요? ‘문화 대통령’이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그 시대의 문화를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이 무조건 옳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첫 번째 사례가 되었습니다.
‘결과론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과는 이미 나왔으니, 그 결과가 나온 이유에 관해 설명하는 거죠. 앞선 프로그램에서 했던, 예측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성공하고 나서는, 부정의 목소리는 들어가고 성공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말이죠. 이것으로 명확하게 증명된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측할 순 있어도 장담할 순 없는 거죠.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 지금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길이 옳은지는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도 해줄 수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됐을 때 옆에서 마음으로 아파해줄 수 있지만, 실제 아픔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수시로 갖는 겁니다. 나를 잘 알아야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좋을지 압니다.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자기를 돌아본 사람은 자기 자신과 친하며 믿음을 갖게 됩니다. 믿음으로, 스스로 책망하는 게 아니라, 이 또한 길이라 여기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 말이죠. 어떤 방향이든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불확실한 세상과 마주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라 확신합니다. 이 방향에 대한 확신을 품도록 한 문장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이 문장을 되뇌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각 사람이 무엇을 가져야 좋을는지 아시고, 이 사람은 왜 적게 받고 저 사람은 어째서 많이 받았는지 아시나이다. 각 사람의 공로는 다 당신이 한정하셨사오니, 이 모든 것을 분간하는 것도 저희가 할 것이 아니요, 당신이 하시는 것이옵나이다.”
<준주성범 제3권 22장 3항>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