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꽉 막힌 어둠에 갇혀있을 때, 한 줄기 빛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귀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끝이라는 생각이 들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더는 나아갈 힘이 없을 때, 앞에서 끌어주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정말 귀한 사람이고 귀한 도움입니다. 올 한 해만 돌아봐도, 금방 떠오르는 귀인들이 있습니다. 원망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한 도움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고, 얻지 못할 귀한 사람인 거죠.
귀인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뭣하지만, 어릴 때의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중학생 때였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발에 습진이 심하게 생겼습니다. 살갗이 벗겨지고 진물이 났는데요. 너무 아팠습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처방이라며 소개해 준 것이 있었습니다. 하얀 크림 같은 약을 바르고 랩으로 씌우라는 건데요. 그대로 했습니다. 약을 바르고 랩으로 발을 감쌌습니다. 두툼해진 발로 평소보다 큰 양말을 신었습니다. 교실에 들어갈 때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했는데요. 매우 불편했습니다. 갈아 신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통증이 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습니다.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통증이 덜하니 계속, 이 방법으로 생활했습니다. 불편함보다는 통증이 더 견디기 어려웠으니까요. 시간이 지나고,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합기도 도장을 찾았습니다. 왜 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도장에 들어갔는데, 걸음걸이가 이상할 수밖에 없었죠. 관장님은 왜 그러냐고 물으셨고, 이유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소리를 들어야했습니다.
“아이고. 답답아. 그럴수록 바람이 통하게 통풍을 시켜야지.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으면 되니?” 관장님의 말은 랩을 씌우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즉시 랩을 풀었습니다. 촉촉했던 발이, 통풍되면서 건조해지기 시작했는데요. 기분 탓인진 몰라도, 좀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통증이 올라올 때는, 부채질하면 좀 나았습니다. 평소에 활동할 때는 불편하니까 그렇게 해도 되지만, 집에 있을 때는 반드시 통풍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는데요.
상처가 아무는 게 눈에 띄게 보였습니다. 점차 랩을 씌우지 않고 밴드로 상처를 감쌌고, 시간이 될 때마다 통풍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상처가 다 아물었습니다. 관장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랩을 씌우고 다녔을지 모릅니다. 랩을 싸고 다니는 것을 떠나 상처는 낫지 않고 더 심하게 곯았을지도 모릅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귀인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상처를 낫게 해주었으니까요.
귀한 사람은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공기와 물처럼, 있을 때는 모르지만, 부족하거나 없어 봐야 소중함을 아는 것처럼 말이죠. 함께 있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냥 당연히 있는 사람으로 여겼지만, 빈자리를 느끼고 나서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앞에 다가온 시련은, 귀인을 부르는 초대장인지도 모릅니다. 시련을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주변에 존재하는 귀인을, 항상 느끼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바라보면, 귀인이 보입니다. 주변에 항상 있는 귀인을 귀인으로 느낍니다. 배고플 때 밥을 주는 귀인이 있고, 작동법을 모를 때 알려주는 귀인이 있습니다. 혼자 있기에 뭣한데 연락이 오는 귀인이 있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약속을 취소하는 귀인이 있습니다. 반갑게 인사 나눠주는 귀인이 있고, 지금 상태에 감사하게 하는 귀인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귀인은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인 거죠. 귀인이 없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