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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

by 청리성 김작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귤껍질을 깐다. 깐 껍질은 한곳에 잘 모아둔다. 그리고 귤 알맹이는 버린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묻는다. “아니, 귤은 알맹이를 먹으려고 껍질을 벗기는 건데요. 알맹이는 버리고 껍질만 모아두는 이유가 뭔가요?” 귤껍질을 깠던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쳐다보며 말한다. “귤껍질로 차를 끓여 마시라고요. 알맹이는 차를 끓이는데, 필요 없으니까요.” 질문했던 사람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는 귤껍질로 차를 끓이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과일에 껍질을 벗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껍질을 벗겨야 드러나는, 알맹이를 먹기 위해서다. 귤도 그렇고, 사과나 배도 껍질을 벗기고 먹어야 맛이 더 좋다. 수박도 마찬가지다. 껍질을 벗겨서 알맹이를 먹기 어려우니,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알맹이를 발라먹는다. 이렇듯 과일 껍질을 벗기는 이유는, 알맹이를 먹기 위함이다. 이에 더해, 껍질을 부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귤껍질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한다. 수박 껍질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겉껍질과 알맹이 사이에 하얀 부분을 도려내서, 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마 했는데, 의외로 맛있다고 한다. 부드럽게 씹힌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을 거다.

과일 껍질을 부수적으로 사용하는 사례 말이다. 시골이나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라면, 껍질을 말리고 갈아서 비료로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열대 과일처럼 단단한 껍질은 음료수 잔이나 술잔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 안에 남은 과일 맛이나 향이 배어, 고유한 맛을 내기도 한다. 중요한 건, 부수적인 사용이라는 거다. 부수적인 사용을 위해, 본질적인 용도를 버리지 않는다. 귤껍질로 차를 끓인다고 알맹이를 버리진 않는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먹고, 껍질은 차를 끓이는 데 사용한다.

말도 안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일이 일상에서 자주 벌어진다. 본질을 외면한 채, 부수적인 역할이나 효과만을 바라보는 현상 말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처럼,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상황으로 몰아간다. 공동체의 규칙이 그렇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들만의 규칙을 만든다.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다. 규칙이 없으면 공동체는 금방 와해할 가능성이 크다. 누구든 자기 멋대로 하는 곳에서, 누가 있고 싶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가 형성된 본질과 맞지 않는 규칙들이 발견된다.


본질은 빠지고 부수적인 것만 남는 거다.

“원래 그런데요.”라는 말이 그렇다.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서, 이해되지 않는 규칙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물으면, 돌아오는 답변이 보통 이렇다. 이유는 모르겠고 자신이 합류했을 때부터 있었다고 말이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면, 없애도 되는데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어떤 때는 불필요한 규칙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도 발생한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일 혹은 좀 불편하고 마는 일이라면 그나마 낫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있어 헬기를 띄워야 하는데, 협조 공문이 오질 않아 띄우질 않는다. 결국, 적기를 놓쳐, 치료할 수 있는 환자는 깨어나지 못한 상태가 된다. 시스템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그 시스템이 때로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기도 하는 거다. 정말 중요한 본질. 그 본질을 망각하거나, 원래 그렇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일상에서, 무감각하게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맹이는 버리고 껍질만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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