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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서김 Dec 19. 2020

코로나 백수의 일상과 잡담

Feat. 의식의 흐름

 지난 3월, 코스피가 2200에서 1400으로 급락했다. 그다음 달인 4월부터 지금까지 내가 일하고 있는 항공사의 조종사들은 홀수 달, 짝수 달로 나누어 격월로 근무하고 있다. 기장은 해당 월의 1일부터 말일까지 일하고, 부기장은 해당 월의 16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일한다. 기장, 부기장이 둘 다 1일부터 근무하면 매 달 1일엔 둘 다 한 달씩 비행을 안 한 상태이기에 실수할 확률이 높아져 이런 식으로 나누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 나는 11월 16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일했고, 다음날인 12월 16일부터 쉬고 있다. 이변이 없다면 1월 16일부터 다시 한 달간 비행할 것이다. 코스피는 바닥을 찍고 반등해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데 어째 현실은 1400일 때보다 더 나쁘다.

  휴식 달에는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난다. 일어나도 할 일이 없어 좀 더 늦잠이나 자볼까 하지만 7시 30분이 되면 저절로 깬다. 늦잠 자려고 억지로 다시 눈을 붙여 보지만 이미 정신이 깬 상태라 다시 자더라도 옅은 잠에 들고, 불쾌한 꿈을 꾸게 되니 더 피곤하다. 하는 수없이 7시 30분에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는 건 아버지의 영향이다. 내가 어리고 아버지가 젊었을 때,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조기축구를 하고 출근했다. 덕분에 우리 집은 하루가 빨랐다. 고등학생 때는 0교시가 있어 다른 학생들도 학교에 일찍 왔지만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도 나는 늘 학교에 빨리 갔다. 항상 반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학생이었다.

 백수가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면 하루가 꽤 길다.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카야 잼을 바른 식빵 한 조각과 방울토마토, 샤인 머스캣 몇 알을 아침으로 먹었다. 사용한 그릇을 정리하고, 프렌치 프레스에 원두가루 3 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7분을 기다린 뒤 찌꺼기는 바닥에 두고 완성된 커피만 잔에 따랐다.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1시간 반 정도 글을 썼다. 글쓰기는 요 근래 유일한 취미다. 그리고 책을 좀 읽었다. 와이프가 뒤늦게 일어나 간단한 아침 대화를 하고 아점을 먹었다. 2시간 정도 지나니 소화가 다 되어 집 근처 하천으로 러닝을 다녀왔다. 나는 요새 급증한다는 확 찐자다. 넉넉하던 유니폼 바지가 안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한 달 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런데이라는 앱이 하라는 대로 뛰고 있는데 성취감도 느낄 수 있고 실력도 느는 것 같아 좋다. 돌아와서 샤워하고 유튜브를 봤다. 이제 저녁식사 때가 되면 저녁을 해 먹고, 잠들 때까지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볼 것이다.

 오늘의 일상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의 일상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휴직하는 한 달 동안 똑같은 생활을 보낼 것이다.

 나이 30에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재작년에 은퇴를 하고, 한창 무언가를 배우러 다녔다. 생전 안 해본 악기를 배우신다길래 기타를 사 드렸다.  헬스장도 등록하고 뭐든 해보려고 밖에 나갔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고픈 거 다 해 보라고 내버려두셨다.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원래 사람이란 동물은 이런 것인지, 나도 일이 갑자기 없어지다 보니 어떤 거라도 하고 싶다.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휴직 달은 참 괴롭다. 몸은 편하지만 목표점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철학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사나’,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고,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부르주아들이 노동자 계급을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을 논의하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노동자들은 잡생각 못하게 일을 빡세게 시켜야 해. 일이 설렁설렁하면 딴마음 품게 돼.’ 맞았다. 노동자인 나는 일이 없어지니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쉬는 달에는 시험공부를 했다. 기장이 되기 전 취득해야 하는 자격증인데 할 것도 없으니 따놓자 하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5개 과목을 합격하면 된다. 2과목을 합격했다. 3과목이 남았다. 이번 달에 남은 과목들을 공부해볼까 했지만 코로나가 심해져 시험날짜 잡기도 힘들고 의욕도 안 생겼다. 이번 달은 그냥 좀 편히 쉬어보자고 결론 내려 이렇게 편하고 무기력한 글을 쓰고 있다.

 어제와 그저께 연이어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연락했다. 한 명은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한 명은 레지던트 의사다. 둘 다 내 안부가 궁금해 연락했다. 항공업계에 있는 친구가 걱정됐나 보다. 친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업계가 힘든 상황은 맞지만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코로나만 끝나면 더 잘될 거니까 우리 회사 주식 사놓으라고 말도 했다.
 
 사실, 친구들 걱정대로 타격이 크다. 월급은 작년 많이 받을 때에 비해 거의 1/3로 떨어졌고, 11월부터는 유급휴직도 무급휴직으로 전환되었다. 스트레스가 없진 않다. 대형 항공사 부기장이라면 지금보다 고용불안감이 적을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우리 회사는 더 작고, 더 휘청이는 회사다 보니 회사가 없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루에 한 번 이상 한다. 그런 종류의 악몽은 일주일에 2번 정도.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큰 스트레스 없이 그런대로 살고 있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얘기 꺼내는 게 조심스럽고 스트레스도 심할 거로 예상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와 아내는 큰 상실 감 없이 그런대로 살고 있다. 부모님도 부쩍 요새 내 안부를 자주 묻는다. 이전까지 부모님은 형 걱정은 심히 해도 내 걱정은 거의 안 했다. 코로나 덕에 주변 사람들이 안부도 물어봐주고,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닌 가보다. 부모님에겐 일전에 사놓은 주식이 많이 올라 대출금 못 갚을 일은 없다고,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얼마 되진 않지만.) 전쟁나서 피란가더라도 웃을 땐 웃어야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루종일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아봤자 좋을 것도 없다.

 우연히 출, 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타거나 큰 거리에 가게 되면 직장인이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아 이 시국에도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항공업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보니 모든 업계가 다 한가할 거라고 착각했다.

 작년은 모든 날이 성수기처럼 바빴다. 유례없는 항공업계의 초호황기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기가 베트남인지, 태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비행스케줄이 너무 많아 힘드니 다음 해에는 제발 한가하게 일하고 싶다고 하늘에 빌었다. 하늘이 너무 세게 소원을 들어주셨다.

- 나보다 훨씬 힘들게 코로나 시기를 겪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불쾌하게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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