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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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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Jan 30. 2019

외삼촌의 다방커피

일러스트 음식 에세이



막내 외삼촌은 멋쟁이였다.

언제 어디서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장발 머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하루의 큰 일과였다.


엄마는 삼촌이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항상 못마땅해했다.

수시로 투닥투닥 입씨름이 오갔는데 주로 엄마의 등짝 스매싱으로 종료되는 싸움이었다.

외삼촌은 저녁을 얻어먹고 나서 엄마랑 투닥거리고는 ‘누나는 멋을 몰라!’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슬쩍 귀가하는 패턴이었다.


당시 외삼촌의 모든 가치는 ‘멋’이었다.

이 직업은 멋이 있는지 없는지, 저 사람은 멋이 있는지 없는지.


‘누나, 오늘 같은 날에도 같은 반찬이면 멋이 없지!’

‘삼촌, 맛 이야기하는 거야? 맛있는데? 맛없어?’

라고 이야기를 하면 외삼촌은 내 콧등을 탁 치며

‘바보야. 넌 아직 어려서 몰라. 음식은 맛만으로 먹는 게 아니야’

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엄마는 밥그릇을 상위에 큰 소리로 내려놓으면서 한마디 했다.  

‘저 놈팡이’


내가 태초에 멋을 자각하게 된 것은 아마 이렇게 요란하고 부산스러웠던 외삼촌의 덕이었을 것이다. 엄마한테는 한심해 보였을지도 모르는 외삼촌이었지만 나는 외삼촌을 좋아했다.


어른이지만 엔간해선 잔소리를 한다거나 혼내지 않고 나랑 아주 말이 잘 통했다.

나처럼 엄마한테 항상 혼나는 동지라는 연대감도 한몫했었다.

한마디로 어른이기는 했지만 나랑 동급이라고 파악했다.


한 번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전화해 나를 반나절 정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먼 친척의 상이 있어서 급하게 다른 지역으로 가야 했던 것 같다. 내가 어느 정도 크기 전까지는 초상집은 데려가지 않았다.

부름을 받고 온 외삼촌은 항상 멋쟁이였지만 그 날은 더 차려입은 차림이었다. 백바지와 백구두 차림에 구두는 아주 반짝였다. 엄마와 외삼촌의 푸닥거리가 한 판 끝나고서야 겨우 삼촌의 탈탈거리는 빨간 티코를 타고 어디론가 출발했다.


‘내가 오늘 아주 좋은 곳 데려가 줄게. 다방 가 본 적 없지?’

삼촌은 특유의 허세가 가득한 폼으로 운전을 했다.


삼촌이 데려간 곳은 이층에 있는 다방이었다.

낮이었는데도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곳곳에 어두운 갈색 테이블에 빨간 벨벳 소파가 놓아져 있었다.

칸칸이 앉아있을 때 시선을 막아주는 정도의 높이의 칸막이도 있었다.

담배를 여기저기서 피우는지 담배를 태우는 냄새랑 켜켜이 쌓인 담배 쩐내가 약하게 같이 났지만 그때는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라 어린 나에게도 생소한 냄새는 아니었다.

그것보단 담배냄새 사이사이 촘촘히 껴있는 커피 향과 그보다 낮게 깔린 외국 노래가 호기심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커피 향은 달달한 향을 내면서도 쌉쌀한 향이 묵직이 자리 잡고 있는 오묘한 향이었다.


삼촌은 나에게 듣고 싶은 음악은 신청해도 된다고 하면서 동요는 취급 안 한다며 나를 놀렸다.

‘킥킥’

삼촌은 나 들으라고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을 한 게 아니다.

다방에는 삼촌을 기다린 이가 있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있었다.

이런 한심한 농담에도 잘 웃는 예쁜 언니였다.

삼촌은 종원원이 가져다주는 메뉴판을 설렁설렁 뒤적이다 커피와 데운 우유를 시켰다.


나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사람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앉아있었다. 와중에 빨간 소파가 나에겐 높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이 미묘하게 놀림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향긋한 커피가 예쁜 커피잔에 담겨 두 잔이, 투명 유리잔에 담긴 데운 우유 한잔이 함께 나왔다.


꽃이 잔뜩 그려진 예쁜 잔에 담겨 나온 갈색의 커피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예쁜 잔에 달린 작은 손잡이는 너무 작고 장식적인 느낌이라 세 손가락을 이용해서 들어 올리는 손동작은 왠지 멋져 보이고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나도 새끼손가락을 들고 천천히 마셔보고 싶었다.

하지만 종업원은 커피 두 잔을 삼촌과 맞은편 예쁜 언니에게, 나에겐 데운 우유를 주고 사라졌다.

나는 볼맨 소리로 삼촌에게 음료를 내 것과 바꾸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안돼. 이곳에 데려온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라고. 꼬맹이 주제에.’

‘하지만 만날 만날 마시는 이 우유는 멋이 없잖아.’

나는 삼촌이 자주 쓰는 단어인 멋을 이용해서 설득했지만 멋보다는 나이가 우선이었나 보다.


‘아 안돼 안돼 이건 어른만 마시는 거야. 넌 너무 어리다고.’

‘그래. 이 언니도 커피를 마신 지 얼마 안 됐어. 너도 나만큼 크면 마실 수 있어.’

맞은편 언니가 외삼촌 말을 거들었다.


‘그럼 언니는 몇 살인데요?’

‘나는 대학생이야.’

나이를 물어보니 신분이 돌아왔다.


울어재껴 볼까도 잠시 고민했었는데 평일 낮의 카페는 몹시도 조용했고, 떼를 쓰면 역시 어리다고 예쁜 언니야한테 무시를 받을 거 같았다. 삼촌을 째려보며 우유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우유를 원샷하고 나니 예쁜 언니의 립스틱과 손톱의 매니큐어에 눈이 갔다.

우유 가지고 자존심 상한 것을 그새 까먹고 나도 발라보고 싶다고 졸랐고 예쁜 언니는 그럼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했다.

나는 삼촌에게 제지당하기 전에 얼른 맞은편 예쁜 언니 옆자리로 옮겨 팔짱을 걸고 두 손을 내밀었다. 예쁜 언니야는 어깨동무하듯이 나를 폭 안아서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에 빨간색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맘에 드니?’

‘응. 이제 언니만큼 이쁘지 내손도?’

삼촌한테 손을 쭉 내밀었다


‘아니. 넌 한참 멀었어 꼬맹아.’

외삼촌과 예쁜 언니야는 점점 나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에 집중을 했었고 옆에서 알아듣는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깼을 땐 다시 집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예쁜 언니야는 못 봤다.


그렇게 다방의 추억은 잊혔었다. 교토 여행을 가기 전까지.

작년 봄, 교토 아라시야마를 갔을 때다. 벚꽃도 피기 전의 봄이었지만 계속 걷고 있자니 갈증이 나는 그런 정도의 날.

블로그와 인스타의 힙한 카페를 찾았지만 여기저기 만석이라 계속 동네 안쪽으로 카페를 찾아나갔다. 일행과 나는 몹시 지쳐서 커피숍 찾기를 포기하려 했다. 사실 힙한 카페라면 서울에서도 지겹게 갔던 터라 그다지 새롭게 보이진 않았다. 사람만 버글버글 많을 뿐이었다.


마지막 힙한 카페 바로 앞에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다방이 있었다.

간판도 한쪽이 내려앉아 삐뚜름하게 달려있었다. 하지만 자리는 널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들이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있을까, 자리가 있는 가게에 감사했다.

갈증을 넘기고 가게 안을 살펴보니 9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손때가 켜켜이 쌓인 어두운 체리색 테이블과 벨벳 소파에, 낡아빠진 모양이 아주 그럴듯해 빈티지처럼 보이는 가전제품들이 의외로 일행의 마음에 쏙 들어 신선한 곳을 찾았다며 좋아했다.


다방 안에는 미간에 내 천(川) 자를 아로새긴 채 서류를 훑어보는 중년의 비즈니스맨과 관광객에 치여서 한적한 카페로 피신 온 것 같은 이십 대 초반의 일본인 커플만이 있었다.

대화에 푹 빠져있는 커플은 그때의 외삼촌과 예쁜 언니야가 생각났다.

그때의 외삼촌처럼 남자는 잔뜩 꾸미고,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고,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옆에 어린 여자도 그때 그 언니처럼 뭐만 하면 잘 웃었다.   


내가 삼촌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삼촌은 장발머리였는데 시대가 바뀌어 서태지가 나오고, HOT가 인기 있을 즈음까지 삼촌의 장발 스타일은 제법 오래갔다.

나를 다방에 데리고 갔었던 때만 해도 외삼촌은 온갖 청자켓과 가죽점퍼를 입고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못 말리는 멋쟁이였는데 그때를 정점으로 세상은 계속 새로움으로 중무장하고 외삼촌의 멋짐은 점점 촌스러움으로 뒤로 밀려갔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우리는 무수한 힙한 카페들 사이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일본 한 귀퉁이 오래된 다방에서 신선함을 찾고 기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그때의 외삼촌과 빨간 매니큐어의 예쁜 대학생 언니야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데운 우유는 달큼한 다방 커피를 동경했었고 이제 어른의 멋은 달큼한 다방 커피와 아메리카노의 쌉쌀한 맛 그 어딘가에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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