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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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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Apr 12. 2019

로맨스와 피아노와 월남쌈

일러스트 음식 에세이


‘여기 피아노 성인 레슨 하시죠?’

‘네?’

‘아,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데요...’

‘...’

멍한 인상의 여성이 날 바라보았다. 삼십 중 후반의 여성이었다.



나에게 소소한 로망이 있다.  

섬세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무심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다.  

섬세하고 기다란 손가락은 성장이 멈춰버린 지금은 다음 생을 기약해야겠지만 피아노 연주는 시간을 들이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휴학을 하고 빈둥빈둥 놀던 시절 피아노를 배워볼까 하고 동네를 훠이훠이 둘러보았다.

동네에 피아노 학원은  큰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기 전 허름한 곳과 건너서 있는 번듯한 피아노 학원 두 곳이 있었다


무엇이든 가까운 게 최고라는 마음에, 허름함을 너머 다 쓰러져가는 한옥인가 판잣집인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학원에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들어간 나는 밖보다 더 허름한 내부를 보고 잠시 그냥 다시 나갈까 싶기도 했다.


작은 원룸이 하나가 있고 한옥의 부엌이었던 자리와 작은 마당을 터서 지붕을 덮어 만든 실내가 또 있었다.

그렇게 생긴 내부 공간에 피아노가 한 대씩 들어찼다. 부엌 자리에 디지털 피아노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따뜻한 방안에 피아노는 건반이 엄청 무거워 한 곡만 치고 나면 볼링 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작은 마당에 있는 피아노 하나만이 그나마 현역으로 뛰고 있는 그랜드 파파 피아노였다.


선생님은 항상 벨벳이라던가 레이스 소재의 드레시한 원피스에 잔머리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긴 파마머리를 업스타일로 고정해 우아한 패션을 보여주셨는데 스타일에 비해 경제적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지 항상 디테일과 소재가 아쉬운 옷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다니게 되었던 피아노 학원은 여러모로 다른 학원과는 달랐다.


일단 두세 달 다니면서 다른 수강생을 보지 못했다. 저녁에는 아이들이 몇몇 찾는 것 같지만 내가 가는 시간에는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학생이 없다 보니 나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나는 심심한 선생님의 말 상대도 되어주고 선생님은 지불한 수강료보다 차고 넘치게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셨다.


평일의 오후를 둘이 보내는 게 익숙해질 무렵, 선생님은 학원에서의 점심식사에도 초대하였다.


초대받은 날, 메뉴는 선생님이 집에서 만들어 오신 월남쌈이었다.

월남쌈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단무지, 오이, 피망, 방울토마토를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먹을 뿐이었다.

소스도 없고 밍밍한 맛이었지만 단무지로 최소한의 간을 잡았다.

둘은 싱싱한 채소가 어금니에서 갈리며 내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먹는데 집중했다.

이것이 심심한 건지 한가한 건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게임 잘하세요?'

선생님이 침묵 속에서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전 못하면 빨리 질려서 잘할 때까지 하질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게임을 못해요.'


'저는 이 교습소 차리기 전까지 몇 개월 동안 게임만 했어요.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긴 하다. 벨벳 원피스에 업스타일로 세팅한 모습으로 게임에 열중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제가요. 사실은 ㅁㅁ에서 부잣집 막내딸이에요. 좀 많이 잘 살아서 저택에 살았어요. 거기 지역 대학교에서 피아노도 전공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제가 사랑에 빠졌어요.'


'게임에요?'


'아뇨. 남자요. 근데 그 남자가 조폭이었거든요.'


'네?'


'말 그대로 조폭이요. 집에서 반대가 심해서 도망쳤어요. 정말 말 그대로 야반도주요. 그래서 이 지방에 왔어요.'

고작 차 타고 삼십 분 거리의 지역이었다.

집에서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며 월남쌈을 또 하나 입에 넣었다.

게임에서 시작해서 인생이 펼쳐졌다.


'도망치고 나서 애를 낳고 남편도 손을 씻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우리 부부는 원룸에서 컴퓨터 두대를 놓고 하루 종일 게임만 했어요. 게임을 해서 게임 아이템을 파는 거죠.

그게 우리의 수입의 전부였어요.'

'네? 그게 돈이 돼요?'

'네ㅋㅋ 하루 종일 하면 한 달에 한 사람이 삼십만 원 정도 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을 하면 월세도 내고 어린아이도 키웠어요. 그런데 저도 게임을 잘 못하고 안 좋아하거든요. 몇 달을 밤낮없이 게임을 하다가 못 버티겠어서 이 다 무너져가는 피아노 교습소를 헐값에 넘겨받았죠.'


뜬금없는 과거 이야기에 월남쌈을 우적이면서 잠시 고민을 했다. 놀랐다는 것을 약간의 호들갑과 함께 보여주며 반응을 하는 게 맞는지 덤덤하게 이야기를 듣는 게 맞는지. 만날 만날 잠만 자다가 피아노 학원 오는 게 다인 게으르고 아무 일 없는 휴학생의 인생과는 다르게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 하고는 연락해보셨어요? 애도 낳고 살고 계신데.'

'아직 생각 없어요. 집에서 찾으시려면 벌써 찾았겠죠. 사실 멀지도 않은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연락해봐야 하나 싶긴 해요.'


'그래도 손자 보시면 좋아하실 거 같아요. '

나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면서 당신의 이야기가 단순 점심 반찬처럼 보이지 않게 덤덤해 보이고자 무척 노력했던 거 같다.

항상 조금은 나른해 보이고 멍한 표정을 짓는, 싸구려지만 항상 드레시한 원피스를 입는 피아노 선생님은 사실은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사랑의 야반도주를 한 부잣집 아가씨였다.


피아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먹은 월남쌈은 맛보다는 열정적인 로맨스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모험담이 남아있다. 지금도 월남쌈을 먹게 될 때면 라이스페이퍼를 말면서 드라마틱한 피아노 선생님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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