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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06. 2019

22. 킬로그램과 근

- 작은 편의

구정이 시작되기 전날 오전, 연휴에 먹을 걸 챙겨놓기 위해 동네 마트에 들렀다.


작은 마트 안에는 방금 들어간 나와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세 명의 직원이 막 입고된 제품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할아버지는 내 관심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계산대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여직원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는데,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한 듯 보였다. 어차피  나는 천천히 장을 보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러니까, 이 양념으로 고기를 몇 근을 할 수 있는 거요?"

"여기 병에 쓰여 있잖아요, 할아버지. 고기 2.1킬로그램이래요."

"그러니까. 그게 근으로 하면 얼마냐는 거지."

"...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이 대화를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만 3번이 오고 갔다. 그 와중에도 그 여직원과 다른 한 명의 여직원과 남직원은 할아버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부지런히 박스를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아침부터 진상 고객 한 명 입장인 것이다.


최근 예전에 쓰던 단위를 없애고 표준 단위를 쓰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제일 많이 바뀌지 않는 단위가 '근', '말', '평'이라는 단위이다. 재래시장과 부동산은 여전히 예전 단위를 많이 쓰며 혼용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환산 능력은 떨어지며, 급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인터넷에 의존하면 된다. 하지만, 킬로그램이나 그램은 꽤 오래전부터 쓰이고 있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간단하게 장을 본 후, 계산대로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서 계셨다. 그 순간, 한 가지 상황이 상상됐다. 할머니가 고기를 양념하기 위해 시판 양념을 사 오라고 했는데, 할아버지에게 근으로만 얘기했다. 필시, 누군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사 가도 될법한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전에 한 번 잔소리를 크게 들어서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할아버지에게 동정이 갔다. 물론, 마른 몸매에 등산복 차림인 모습이 돌아가신 아빠를 떠오르게 한 것도 한몫했지만. 동시에 그 잔소리의 주인공인 우리 엄마의 모습도 떠올라버렸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싸움 시추에이션이다.


바쁜 직원들에게는 모른다는 데 계속 버티는 할아버지가 눈엣가시였을 거다. 저런 손님이 한둘이겠는가. 시간 여유가 있던 나는 휴대폰을 이용해 할아버지를 돕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단위 환산에 '근'이 있는지 여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할아버지가 임무를 완수하게 도와줄 방법은 있으리라.


"할아버지. 제가 알아볼게요."


나는 우선 호기롭게 말하고 휴대폰으로 단위 환산을 찾았다. 오오~ 근이 있구나! 2.1킬로그램을 입력하자 3.5근이 나온다. '삼 쩜 오근'이라고 말하려다가 할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서 '세근 반'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늘어져있던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일자로 바뀌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감추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여직원의 낯빛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근 정도 할 거라고 그랬는데."


한국어에서 가장 어려운 말 중의 하나인 ‘정도'. 이번에는 다른 여직원이 작은 크기의 양념병을 가져왔다. 계산해보니 마침맞을 것 같았다. 음식을 할 때는 마침맞기보다는 좀 여유가 있는 게 나을 거 같아 할아버지에게 같은 크기로 두 병을 사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한테 잔소리 안 들을 거 같다면서. 이번에는 좀 도울 여유가 생겼는지 여직원이 여직원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할아버지, 불고기 양념이에요, 갈비 양념이에요?"

"..... 갈비."



아뿔싸. 우리 눈앞에 있는 건 모두 불고기 양념이었다. 어떡하냐. 여직원은 갈비 양념으로 같은 상표로 두 개는 없다고 이야기하자, 할아버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셨다. 내 눈에 할머니가  다른 상표로 가져왔다고 뭐라고 하는 게 눈에 선했다. 할아버지가 혼나지 않게 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나. 최선의 방법은 다른 마트에 가서 구하는 건데, 할아버지가 과연 그걸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 그건 할아버지가 선택해야 할 문제야. 나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았다. 할아버지는 좀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생각 중이셨다. 여직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런 분들이 계신다며, 도와줄 상황이 못된다고 말씀드리면 벌컥 화를 내시는 분들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하셨다.


그 마음이 백 번 이해 가는 건 일흔이 넘은 우리 아빠도 어느 날 길에서 너무 목이 말라 제과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생에게 - 아빠에겐 구분이 안 갔겠지만- 물 좀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소리를 질렀다는 일화를 들은 게 생각나서였다. 그때도 사장이 나와서 물을 드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늙어서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었다.


조금의 편의라는 건 입장에 따라 큰 편의가 될 수 있다. 내가 여유가 있다면 베푸는 건 일도 아니지만, 요령을 모르고 정해진 규칙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에겐 아주 어려운 부탁을 너무도 당당하게 얘기한다고 생각하며 불쾌해할 수도 있다. 오늘 나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반대의 경우였다면 할아버지를 몰래 째려볼 수도 있었으리라.


그래도 보람 있었던 건 계산을 마치고 나갈 때 할아버지에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시는 어르신들도 많기에, 감사인사를 받으면 도와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존댓말로 감사해하니, 괜히 어깨가 올라간다.  


친정에서 구정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할아버지가 운전기사에게 대전역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냐고 물었고, 운전기사는 방법을 얘기해줬다. 어르신들에게 BRT 노선은 매우 어렵다. 안타깝게도 이 버스는 BRT 노선이 아닌 일반 노선에 정차하므로 할아버지가 혼란스러울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나와 같은 역에 내린 할아버지 옆에 같이 내렸던 세 명의 아이들이 딱 붙어서더니 건널목까지 데려다주고 탈 정류장까지 자세히 설명을 드리고 인사를 꾸벅하고 갔다. 이번 할아버지도 아이들에게 고맙다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청소년과 관련된 흉흉한 뉴스도 많았는데, 이런 장면을 보니 또 내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온 말. "아이고, 예뻐라." 혼잣말을 하는 횟수가 는 거 보니 나도 늙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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