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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25. 2019

3. 알맹이 있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 영어를 잘한다는 의미

영어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발음이 가장 중요했다. 영국 억양이든 미국 억양이 든 간에 하나라도 비슷하게 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서 드라마와 영화, 뉴스 등 닥치는 대로 많이 봤던 것 같다. 슬랭 (slang)과 숙어 (idiom)을 외우려고 엄청나게 외웠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시간이 이만큼 흐르고 나니 발음보다는 문법이, 문법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회화'에서도 내용은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내가 일하는 분야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의 차원에서 말해보려고 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겠지만, 통역/번역을 하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이 제일 말을 잘하는 줄 아는 사람-한국어든 영어 든 간에-, 자신이 준비해온 걸 맥락에 상관없이 모두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의견만 광광 거리며 말하고 일어서는 사람 등등.


영어공부를 시작하던 초반에만 하더라도 내 생각을 상황에 맞추려고만 했지 한 번도 심각하게 토론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도 논리적으로 핵심을 말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좀 더 확실하게 느꼈다. 어릴 때부터 교육과정에서 토론시간이 좀 더 많았다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고백하건대 이 직업을 갖게 되면서 상대방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방법, 논지를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아, 그거 묻는 거였어요?


통역가와 번역가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가장 좋은 것이 업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외국인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전달할 수 있고, 때로는 잘못 대답하는 한국인의 내용을 확인해줄 수도 있다. 여기서 질문. 10년 아니, 3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자신의 업무에 대해 외국인에게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개인적인 경험 통계치로 보자면 다섯 명 중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세 명과는 그냥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왜냐하면 아주 구체적인 질문인데도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해 계속 묻고 또 물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어와 영어의 체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어는 핵심부터 묻는 반면에 한국어는 큰 범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동문서답을 하면 정말 곤란하다. 겨우 의미를 파악하고 답해주는 분들의 특징. "아, 그거 묻는 거였어요? 난 또. 하하하." 그리고, 그분의 업무 능력은 나만 눈치채는 게 아니다. 심지어는 영어로 말하겠다고 하는 분들도 이런 경우가 많다. 분명히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원하는 대답은 해주지 않고 다른 부분만 열심히 설명하면, 끼어들기가 참 뭐하다. 그런 분들일수록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커서 잘못 얘기했다가는 성질만 돋운다. 그럴 때는 슬쩍 이런 내용이 아닐까요 하고 흘리고 모른 척하면 길을 찾아오신다.


물론, 더럽게 말을 못 하는 외국인도 있다. 같은 성향의 외국인과 한국인의 대화를 통역해야 한다면? 전쟁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최대한 집중해도 그들이 던지는 오발탄에 언제든지 맞아 나만 무능력자로 컴플레인을 받게 되니까. 아니면, 아주 좋은 시간이었어요 하고 헤어지고 누구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결말이 더 해피엔딩이 나을 수도.


한국어는 주어가 없는 게 장점이자 단점


외국인들을 위해 쓰는 업무 설명서를 번역할 때 문제는 더 커진다. 한국어의 가장 큰 특징은 주어가 없어도 이해가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업무 설명서에서는 오역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물론, 업무를 파악하고 있으면 몇 개 문장 정도는 해결할 수 있지만, 번역가로서 혼란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작성자에게 묻는다. 여기에서 또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자신이 쓴 문장을 보고 바로 설명해줄 수 있으면 다행인데, 고개를 갸웃 거리면 엄청나게 황당스럽다. "이게 뭐라고 쓴 거냐?"란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러니, 주어를 발견하지 못한 건 번역가만의 실수가 아니다.


물론, 이해는 한다. 오랫동안 한 일이기에 습관처럼 썼던 문장일 테고 내용은 다 아는 거고 다른 부서의 사람들은 상관없는 문서는 읽을 일이 거의 없으니 무슨 뜻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입사원이 들어와 그/그녀의 업무를 물려받아야 한다면 과연 선배의 글을 읽고 나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내용이다


종종 통역이 끝난 후에 외국인이나 한국인과 얘기하다 보면 상대방이 똑똑하다고 언급할 때가 있다. 영어든 한국어든 간에, 그 사람이 물 흐르듯 말을 잘한 게 기준이 아니다. 바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서로 논점이 있는 대화를 하느냐에 달려있다. 한국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도 똑같다. 이 글이 성의 없이 쓴 글인지, 알맹이가 있는 글인지 바로 안다. 성의 없이 쓴 글은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시간은 배로 걸린다. 유에서 무를 창조하려 하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게 힘겨운 노동의 결과를 보내면 돌아오는 답장.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을 잘 파악하셨네요." 이 무슨...


최근에 좀 더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모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에 영어를 제법 오래 공부하고 사용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다른 언어를 들을 때 논지를 잘 파악하는 것 같다. 길게 묻는 외국인의 질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뿐만 아니라 숨은 의도까지 파악하는 한국인도 소수지만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통역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반은 진행된 듯한 기분까지 든다.  


이쯤 해서 고민이 생길 수 있다. 내 분야를 어떻게 영어로 전달할 수 있을까? 아는 분을 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쓰이는 표준 용어를 한국어와 영어로 잘 알고 있고, 그 분야에 대한 기사를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영어 숙제가 아닌, 자신의 생각을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들끼리 직접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무리 발음이 이상해도 상관없다. 외국인은 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중간에서 말/언어를 전달하는 입장에서 확실히 재미있고 흥분될 때는 알맹이 있는 내용이 오고 갈 때이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 분야에 대해 더 관심이 가고, 심지어 통역/번역이 끝나고 나서도 그 분야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알맹이 있게 말할 줄 아는 능력은, 그것이 한국어든 외국어 든 간에, 전문분야에서 대화나 토론을 이어가는데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기 계발을 원한다면 이런 실력도 키워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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