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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Sep 16. 2021

동학농민군의 발길을 따라

杏仁의 길 담화_고부, 무장에서 시작한 동학농민군의 길

 정읍 두승산 봉우리(해발 443m)에 올라서면,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 토벌부대에 대승을 거두며 물리친 황토현 전적지가 내려다보인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4월 7일 이곳에서 전라 감영의 관군과 전투를 벌여 첫 승리를 거뒀다. 

황토현 전적비에 쓰인 "제폭구민 보국안민"이 말하듯,  동학농민혁명은 인간 평등과 사회 변혁을 시도하고 자치정신의 실천을 보여 준 우리 근세사의 대표적 저항운동이다. 


 지난날 권력자들은, 이 전적비를 권력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3일 열린 황토현 전적비 제막식에,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동학혁명 정신의 계승을 언급하면서 “5·16 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라고 말했다 한다. 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아 보자는 꼼수 아닌가?.

 그 뒤 1980년 5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당시 야당 정치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농고에서 열린 13회 동학문화제에 참석하자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기념사업회장을 구속하고, 정읍 군수·경찰서장을 직위 해제했다. 그래 놓고서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에 앉은 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황토현 기념관과 전봉준 장군의 동상 등을 세우도록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행적이다.      


 두승산 아래 배들평야 끝으로 만석 보터가 있다.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이곳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 아래 새로 보를 만들어 군민들에게 물세를 물렸고, 그로 인해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세 장두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갑오년 1월 10일 말목장터에 집결해서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조병갑은 달아났고, 농민들은 무기고와 옥사를 부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부당하게 거둬들인 세미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질이 나쁜 아전들을 처벌하고 만석보 밑 새로 쌓은 보를 헐어냈다. 

    

 고창군의 동학농민 군로 시점인 구수내 기포지에 있는 기념비에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밝힌 포고문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그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만 꾸미고 오직 제 혼자 온전할 방법에만 힘쓰면서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다스려지리오!”(무장포고문)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글귀다.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면, 무장봉기는 동학농민군의 조직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고창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무장 구수내(현 고창군 공음면 구수)에서 봉기했다. 손화중은 당시 최시형과 함께 동학의 양대 접주 중 한 사람이었다. 

 그 해 3월 16일에서 18일 무장 동음치(冬音峙)면 당산(堂山)마을 앞 강변에 집결한 농민군은 그 수가 점차 불어나 4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3월 20일까지 만반의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처음으로 정부를 상대로 <창의 포고문>을 선포했고, 주변 고을마다에 통문을 보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모두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전봉준을 도솔대장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 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앞세우고 소숙재와 과실재를 넘어 무장읍성 앞을 지나고 사신원을 거쳐 인천강 인냇보를 건넌다. 이어 굴치재를 넘고 사포와 후포에서 숙영한 다음 줄포와 눌제를 지나 고부관아에 들이닥쳤다.      

고창 구수내기포지에 설치된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도
동학농민군의 진격로를 따라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무장을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 다시 사흘 뒤 태인현 옹산면 백산(현 부안군 백산면)에서 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했다. 전주성을 점령하러 금구까지 진격했던 농민군은, 4월 6일 전라감영이 보낸 관군을 만나 다음날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것이 바로 황토현 전적비에 기록된 전투다. 


백산성지. 고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여기서 대회를 열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백산성지에서 내려다본 배들평야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정읍과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지나 장성에서 경군 7백 명을 격파하고 주야로 강행군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성에서 농민군은 정부 쪽과 화약(和約)을 맺었으며, 전봉준은 그 해 7월 전라좌우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 체제를 열어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손화중은 이미 5월 이후 무장에 대도소를 설치해 인근 영광과 장성, 고창 일대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는 전라도 곳곳에 집강소 체제를 열어 9월까지 개혁의 시대를 열었다.

고부초등학교에 설치된 고부관아터 안내도

 이들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는 우리 근세사의 대표적 저항운동과 만민 평등의 사상을 계승하는 역사 교육의 장이 돼오고 있다. 전봉준을 비롯해 농민군 지도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집터뿐 아니라, 고부봉기의 역사적 현장인 만석보에서 고부관아터, 말목장터, 구수내기포지, 백산성지, 황토현, 삼례기포지 등 우리 전라북도 곳곳에 동학농민군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고부봉기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해 고창의 구수내기포지에서 고창읍성, 줄포, 농민군의 전주입성 길인 삼천, 용머리고개, 완산칠봉, 농민군이 혈전을 벌인 원평 구미란, 남원의 교룡산성, 여원재, 순창 피노리까지 농민군의 1,2차 봉기와 전적지 등은 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역사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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