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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Dec 02. 2018

[명화와 역사] 6,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 (1815)

[명화로보는 19세기 역사이야기] 6, 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 (1815)
- 토머스 로렌스 <웰링턴 공작의 초상>

거의 전 유럽을 석권하고 마지막 남은 영국을 패퇴시키기 위하여 벌인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리게 된다. 이 해전으로 제해권을 상실한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러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을 상대로 한 대륙봉쇄령은 오히려 프랑스의 고립을 자초했고,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연승을 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이후 드레스덴 전투,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연패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이태리와 프랑스 코르시카섬의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엘바섬의 영주로 강등되어 실직적인 유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1814년 폐위되어 엘바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은 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황제에 자리에 올라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남동쪽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105,000명에 맞서서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68,000명과 프러시아군 45,000명이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회전을 벌이게 된다. 전쟁의 신이었던 나폴레옹답게 오전에 우세한 듯 했던 프랑스군은 연합군 사령관인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뤼허 장군의 협공에 4만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참패하고 만다. 당시 몸이 좋지 않았던(치질 때문이었다고도 하고 위장병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나폴레옹은 오후 들어 약간의 휴식을 갖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사로 들어가 있었다.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던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나폴레옹의 시대는 저물게 되고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쪽 대서양 한가운데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다시 유배를 가서 1825년 굴곡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769년생 나폴레옹과 동갑이었던 웰링턴 장군은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의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져본 적이 없었으며, 나폴레옹과의 진검승부였던 워털루에서도 승리함으로서 영국은 물론 전 유럽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그 이후 정치인이 되어 영국 수상에 까지 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패자인 나폴레옹은 기억해도 승자인 웰링턴 장군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수비축구가 재미 없듯이 수비위주의 버티기를 하다가 막판에 역전시키 그의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을 듯 싶다. 그의 사저였던 앱슬리 하우스에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나폴레옹 누드동상이 있는데 웰링턴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폴레옹의 동상 머리를 만지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만끽하였다고 한다.

본명이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인 아일랜드 귀족출신의 웰링턴은 코르시카 시골출신의 자수성가의 대표적 사례인 나폴레옹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은 선동에 능하고 매력적이었던 반면 웰링턴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는 대면도 하지 않았던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파 중 가장 온건했던 지롱드파의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전 유럽에 퍼뜨렸다. 그가 제정한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여러 국가에서 받아들일 만큼 훌륭했으며, 근대 사회를 만든 개념들, 즉 능력주의와 법 앞에서의 평등,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 종교의 자유, 근대적 교육제도 등은 모두 나폴레옹이 확립하고 전 세계에 퍼뜨린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그가 직접 황제에 오름으로써 변질되었고 결국 워털루전투에서의 패배로 쓸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부르봉 왕정으로 복고되었고, 나폴레옹에 의해 유럽에 퍼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억압되는 반동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영국 여왕의 거처인 윈저성에는 워털루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워털루 기념방이 있다. 이 방의 한 가운데에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가 있고, 그 외에 전쟁 승리에 기여한 장군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를 그린 토마스 로렌스는 죠수아 레이놀즈, 토마스 게인즈버러를 잇는 당대 최고의 영국 초상화가였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발휘하여 1792년 레이놀즈의 뒤를 이어 23세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1794년에 로열 아카데미회원, 1820년에는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당시 섭정 중이었던 조지 4세의 명령으로,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였던 유럽의 여러 군주·외교관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주목을 끌었다. 

* 스웨덴의 팝그룹 아바(ABBA)의 ‘워털루’는 1974년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서의 대상곡이며, 연인들의 연애에서의 승패를 워털루 전투를 소재로 삼아 공전의 히트를 쳤다.
https://www.youtube.com/watch?v=3FsVeMz1F5c

** 1815년 워털루 전투를 다룬 1970년 영화 ‘워털루’
https://www.youtube.com/watch?v=kH2BZgbbKjI

++ 토머스 로렌스(Sir Thomas Lawrence, 1769~1830) <웰링턴 공작의 초상 (The Duke of Wellington) (1815), oil on canvas, 317.1 x 225.65 cm, Windsor Castle, England


윈저성 워털루 기념방
고야가 그린 웰링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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