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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Dec 11. 2023

연차 내고 집캉스

  연차가 많이 남았다. 올해는 여행을 자주 가지도 않고, 병원 갈 일도 많지 않았는지 연차가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사실 매년 연차가 남는 편이라 매년 수당으로 쏠쏠하게 받곤 했었다. 이번에는 연차수당이 꽤 될 것 같다.


  어쨌든 남는 연차는 수당으로 받을 거지만, 기왕 많이 남은 거 조금은 그냥 써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연차를 써보기로 했다. 바로 호캉스가 아닌 집캉스를 하기 위해서. 집 가도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일단은 집에 가고 싶다!!!


  중학생 때 아파서 조퇴를 하고 집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엄마, 아빠는 일하러 가시고 언니랑 동생들도 다 학교에 있어서 텅 빈 집이 엄청 조용했다. 6인 가구가 사는 그 큰 집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찌나 설레고 좋던지. 그냥 낮잠을 자고 뒹굴뒹굴 렸는데 그게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추억을 떠올리며 오후 반차 내고 집에 갔다. 남들 다 일하는 평일 낮에 조용하고 아늑한 나만의 공간에 들어서니 나도 모르게 신나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가 사는 빌라 건물도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아마 대부분 일하러 나갔을 시간일 테니. 나는 이런 고요한 정적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주말에 집캉스도 좋지만 평일 집캉스는 몇 배는 더 설렌다. (오히려 주말엔 집 밖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원래 일해야 하는 시간에 일 안 하는 게 더 좋으니까.


  유튜브로 잔잔한 피아노 연주를 틀어놓고 집안 곳곳의 먼지를 닦고 청소기를 돌린다. 넷플릭스에서 간단하게 볼 수 있는 영화 한 편 골라서 커피랑 간식 꺼내서 식탁에 앉아서 혼자 낄낄대며 본다. 빨래를 널고,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에 취해 낮잠도 한판 때린다. 쭈그리고 앉아 반려 식물들 잎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멍 때리다가 가끔 글감이 생각나면 메모를 해둔다. 그렇게 한껏 여유를 즐기다 보면 금세 퇴근시간이 된다.


  호텔처럼 럭셔리한 인테리어와 멋진 뷰와 조식 뷔페는 없지만, 집에서도 충분히 휴가 온 것처럼 보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민 인테리어와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 내가 좋아하는 음악까지. 온통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채워진 나의 집은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렇게 집캉스를 즐기는 것은 독립 후 할 수 있게 된 특권과도 같다. 본가에서 계속 살았으면 연차를 써도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연차가 많이 남는 거, 이제는 1년에 한두 번쯤은 연차 내고 집캉스를 하기로 했다. 혼자서 조용히 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집 와서 딱히 한 것도 없는데도 연차가 아깝지 않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어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 혼자 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 맘껏 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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