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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Oct 08. 2024

본가에 갈 때마다 엄마에게 듣는 말

  독립을 한 이후로 대략 분기에 한 번 정도는 본가에 간다. 갈 때마다 거의 매번 엄마가 하시는 얘기가 있다. 엄마가 이러저러해서 알게 된 사람의 아들, 조카 등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파워 E 성향을 가지고 계신 엄마는 중매 자리를 끊임없이 알아오신다. 매번 비슷한 조건의 남자들이다. 나보다 2~4살 정도 많고, 서울에 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부모가 돈(자산)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조건을 달달 읊으신다. 조건 나열 끝엔 늘 '그런데'가 붙는다. 다 괜찮은데 키가 좀 작다거나, 다 괜찮은데 좀 못생겼다거나, 다 괜찮은데 학벌이 좀 안 좋다거나 뭐 그런 식이다. 물론 '좀'이 아니라 '좀 많이'의 줄임말일 것이다.


  나는 그냥 웃음이 난다. '그런데'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짝 보면서 말하는 엄마의 말투가 재밌어서이다. 돈 많고, 키 크고, 잘생기고, 학벌까지 좋은 사람이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을 못 하고 있을 리가. 결혼시장에서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를 만날 리가. 당연한 걸 왜 조심스러워하시는지 재밌을 뿐이다. 엄마의 마지막 마무리 멘트는 '돈이 많으니' 그 정도의 흠은 눈 딱 감고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다. 어떤 조건의 남자든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엄마, 나는 결혼 생각 없어." 내가 하는 이 멘트도 늘 똑같다. 엄마와 나는 각자 똑같은 말을 수년째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여자보다 2~4살 많고, 자가가 있고, 돈을 잘 벌고, 시댁에 돈이 많은 남자'는 '엄마의 이상형'이었다. 그리고 또 재밌는 건 엄마가 말하는 조건의 남자들은 '아빠와 정반대의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아빠는 키가 크고, 잘생기고, (연애 당시 20대의 엄마의 눈에) 똑똑해 보이지만, '돈이 없는 남자'였다.


  젊은 시절 엄마도 키가 크고 날씬하고 예쁘셨다. 그러하니 키가 작고 돈이 많은 남자들한테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2세를 생각해서 키 크고 어린 여자를 찾는 키 작고 돈 많은 남자들이 엄마에게 구애를 해왔다. 그때 그렇게 돈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으면 이렇게 수십 년 평생을 고생하며 살지 않았을 거라고 엄마는 분하고 원통해하신다. 그럼 내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가 그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갔었어도, 그 남자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했을 수도 있잖아?" 엄마는 콧방귀를 뀌며 절대 그랬을 리 없다고 단언하신다.(음??)


  돈 없는 남자인 아빠를 만나 수십 년을 돈 때문에 고생만 하면서 살아온 엄마에게 아빠와 정반대의 남자가 이상적인 남편감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서 애 낳고 애 키우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면서 사는 것'이 '여자에게 최고로 행복한 삶'이라고 굳게 믿으신다. 이 믿음은 수십 년에 걸쳐 너무나 거대하고 단단해졌다.


  서른 전후부터 해서 지금까지 수년간 엄마와 나는 계속 똑같이 서로 각자의 입장만 얘기하고 있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20대 때부터 계속 말하고 있는데 엄마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는 것 같다. 왜 엄마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지 않고 엄마 생각만 밀어붙이지? 하는 생각에 짜증이 나곤 했다. 물론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저 딸이 본인이 생각하기에 여자로서 최고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 본인처럼 돈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뿐이었다. 물론 표현 방법은 영 아니지만, 마음은 그러하신 거라고 생각하니 한결 나아졌다.


  엄마 말이 맞다는 것도 안다. 돈이 많아야 편하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여자가 부자가 되긴 너무나 어렵다. 부자가 되려면 1. 부자인 배우자를 만나거나 2. 사업이나 투자로 크게 성공하거나 이니까. 2번보다는 1번이 더 쉽고 달성가능성이 더 높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여자가(금수저가 아니라면) 부자로 사는 경우는 현실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들다. 현실에서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여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적당히 그럭저럭 살아가거나, 아님 돈에 쪼들리며 근근이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돈 많은 남자 만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돈 많은 남자가 찾는 여자는 애 낳고 '찍소리 안 하고' 애 잘 키우고 살림 잘하는 여자이다. 그 대가로 아늑한 보금자리와 편안한 의식주를 제공해 주는 것일 테니. 철저히 기브 앤 테이크가 이뤄지는 거래이다.


  내 친구 중에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친구가 있다. 정확히는 남자의 부모님이 돈이 많으시지만. 어쨌든 학창 시절 집안이 어려웠던 그 친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이 낳고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필라테스 다니고 피부관리받으러 다니면서 잘 살고 있다. 집이 어려웠기에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이제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려고 힘들게 일 안 해도 되고, 백화점에서 비싼 옷 가방도 살 수 있고, 살림하면서 틈틈이 필라테스로 몸매 가꾸고 피부관리와 성형수술을 받으러 다닐 수 있으니까. 친구는 예쁜 아내, 예쁜 엄마가 되고 싶어서 외모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이 친구만 봐도 부잣집에 시집간 덕분에 일 안 해도 되고 경제적으로 걱정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걱정이 없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 고생 안 하고 편하게 산다'라는 엄마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외모를 가꾸는데 별로 관심이 없다. 쇼핑하는 것도 미용실 가는 것도 귀찮아한다.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고 살림만 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이 많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매우 많이 필요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친구처럼 피부관리, 필라테스, 백화점 쇼핑 다닐 돈은 없지만, 일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모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지금의 삶이 좋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만의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다. 돈 많은 남자 만나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육아와 살림만 하면서 살고 싶은 게 꿈인 사람에겐 그게 행복이다. 대부분은 그렇다. 다만, 세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걸 보려고 하지 않는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선 노력이 많이 필요할 터다. 일단 가장 중요한 외모를 가꾸어야 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날 만한 환경과 조건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내가 혼자 스스로 돈을 벌고 돈을 불리는데' 쓰고 싶다.


  내가 계속 소비를 줄이고, 저축하고 투자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여자도 돈 많은 남자 만나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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