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된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기
- 흠.. 이제 나가봐야 되는데 대체 어딜 간 걸까.
분명 어제까지 귀에 꽂고 다녔던 내 이어폰이 사라졌다. 아무리 작은 기계에 불과할지라도 매일 함께 하던 것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면 한동안 진한 상실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늘로 증발해버린 듯한 이어폰을 찾고 찾다 결국 포기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짜증은 둘째치고 귀가 몹시 허전했다. 분명 이어폰을 전혀 끼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길 텐데, 마음까지 헛헛해진 것을 보면 그동안 나도 모르게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에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보다. 주변의 공사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와 같은 여러 소음들을 내게서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젠 그 소음과 온전히 맞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에 민감한 편인 나에게는 그 모든 소음이 단지 ‘시끄러움’으로 통하고 있었다.
퇴근을 일찍 마치고 자주 가는 산책로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그저 계획한 걸음 수를 해치우겠다며 부지런히 걸었을 텐데, 얼떨결에 이어폰을 내려놓게 되니 내게 들리는 것들이 사뭇 다름을 느꼈다. 왜 그동안 내 주변엔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기만 하다고 느꼈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강변을 눈에 담으며 자연스레 산책로의 모든 소리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함께 핸드폰으로 멋진 풍경을 연신 찍어내는 찰칵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와 새들의 대화 소리까지. 자연스레 주변을 관찰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중년의 어느 남자분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그분에게서 영어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맞다.. 나 영어 공부도 해야 되지'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핑크빛 정장 차림으로 멀리 보이는 선셋을 가만히 서서 들여다보던 앳된 여자아이를 보며 문득 예전의 선셋에 빠져 살았던 내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음을 차단해주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는 길들의 모든 주변 상황들과 단절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게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단절된 상황에 서서히 익숙해진다는 것은 점점 자신을 더 외로움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이어폰을 내려놓고나니, 평소보다는 확실히 타인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 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청소 아주머니, 버스에서 만난 기사님, 사무실에서 만난 택배기사님과 사장님들까지. 인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