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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섬타로 Jan 13. 2024

죽음 연습

2022년 11월 30일의 기록

 


  이들에게 세 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가지고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 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세네카는 죽음 명상을 가장 많이 수행한 사람으로, 세네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그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연습한 죽음 명상의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미래를 현재화해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기 삶의 심판관이 되는 것이다. 시간을 겹쳐 보았던 그는 미래를 가져와 현재를 채우고 과거가 된 미래를 통해 전체를 봤다. 심판관의 눈을 통해 미래에 이르기 전에 먼저 미래를 사는 셈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 해설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 박혜진 평론가, 256,7쪽



  김연수의 단편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전율하며 읽었다. 마지막 해설에 실린 글을 읽고 세네카에 대해 찾아보았다. 죽음 명상, 이라니.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단 하루는 내일 죽는다 생각하고 살아봐도 좋겠다 싶어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전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내일모레면 생이 끝난다는데 그럼 이제 어쩌지, 싶어 정신이 도로 맑아졌다. 하루가 내게 주어진다면, 가능하다면 평소처럼 지내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주방으로 가 먼저 차를 끓인다. 화요일 아침, 찻물을 올려놓고 가만히 사물들을 바라보니 대단히 쉽고도 명쾌하게 할 일이 결정되었다. 닭을 잘 못 사와 이상하게 끓여진 육수를 미련 없이 버렸다. 오래되었거나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은 저절로 정리되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든 깨끗이 유지하고 돌보고 싶었다. 죽으면 이 모든 건 누군가가 치워야 할 쓰레기가 될 텐데 가능한 한 단순하고 깔끔하게 관리해야 옳았다. 아침부터 N이 좋아하는 잡채를 만들었다. 맛있다고 좋아하는 얼굴을 나도 모르게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할 일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평소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 일들이 오늘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무한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쉽게 명상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시를 읽었다. 시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수영장에 갔다. 낮의 수영장엔 아무도 없었다. 물결 하나하나의 일렁임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움직임에 맞춰 일렁이는 물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느껴졌다. 늦게 잠들어 기운이 없었지만 마음대로 떠다녔다. 물속에서 수영하는 N을 오래 보았다. 내가 죽어도 이렇게 당신은 수영해야 해. 말없이 지금처럼 내가 당신을 지켜볼 거란 사실을 잊지 않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었다. 예정된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모든 사소한 일들을 덮어버리고 오직 나와 내 눈앞의 소중한 한 가지에만 조명을 비추는 것처럼 무엇을 하든 그것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하나를 보면 하나가 보이고 고개를 들면 전체가 보였다. 갑자기 다른 차원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온전한 나로 존재하게 된 것 같았다.


  청소가 중요했다. 모든 곳을 쓸고 닦아두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평소처럼 간단히 청소했다. 옷장을 열고 가방을 꺼내고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와 남은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수영장에서 벗어둔 슬리퍼를 앞쪽으로 돌려놓았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평소처럼 다섯 권의 책을 골라 빌려왔다. N의 얼굴과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계속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호가든 한 캔을 사서 N과 나눠 마셨다. 잡채를 넣고 계란찜을 해 안주로 먹었다. 평소처럼 다음에 이거 해 보자, 여기 가 보자, 하는 말을 하거나 들을 때마다 내일 죽을 거지만, 실제로는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을 동시에 하며 이것이 그저 연습이란 사실에 감사했다. 평소처럼 서로를 긁거나 짜증 나게 할 만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내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평소보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세네카처럼 수없이 죽음을 연습하면 과연 어찌 될 것인지 궁금했고 다른 분들이 이 연습을 해보면 어떨지도 궁금했다. 어렸을 땐 죽음 앞에 모든 게 허무하게만 느껴지더니 이제 죽음 앞에서 모든 일은 의미가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조차 의미 있었다. 그렇게 긴 하루를 보냈다. 저녁엔 피곤해져서 잠을 못 이기고 평소처럼 잠들었지만, 내게 주어진 내일이 있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의 하루는 분명 내 삶의 마지막 하루가 될 것이다. 그게 오늘이었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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