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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Sep 25. 2020

설렁탕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동화’의 내용은 이렇다.


임금님이 선농단에 제사를 모시러 갔다. 선농제(先農祭)다. 제사를 지내는 중에 폭우가 쏟아졌다. 국왕 일행의 발이 묶였다. 제사에 사용한 고기로 국을 끓이라고 했다. 국왕 일행은 선농제에 모여든 주민들과 국을 끓여 밥을 먹었다. 선농제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이라 불렀다. 선농탕이 변하여 설롱탕, 설렁탕이 되었다.


혹자는 왕이 세종대왕이라고 하고, 더러 성종대왕이라고 한다. 선농탕, 설롱탕, 설렁탕은 오랫동안 ‘다수설’로 여겼다. 국왕이 행사장에 모여든 서민들과 가마솥에 국을 끓여서 나눠 먹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사실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렁탕집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설렁탕과 밥, 반찬들.

조선왕조실록 성종 24년 2월 28일의 기록이다. 두 편의 기록 중 앞은 “선농제의 길일을 초 10일로 정하다”이고 뒤편은 “승정원에서 선농제에 사용한 물건의 처리를 아뢰다”이다. 같은 날 여러 편의 기록 중 선농제 관련 두 편의 기록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노공필(盧公弼) 등이 와서 선농제(先農祭)의 길일(吉日)을 3월 초 2일과 초 6일, 초 10일로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초 10일은 곧 을해일(乙亥日)입니다. 옛사람이 모두 해일을 위주로 하였으나, 더러 해일이 아닌 날에 행사한 적도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초 10일로 정하도록 하라. 옛사람들은 모두 해일을 위주로 하였으니, 지금 비록 부득이하여 날을 물리긴 하였으나, 마땅히 해일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아뢰기를, “선농제(先農祭)의 찬구(饌具)를 이미 설치하였고, 희생(犧牲)도 잡아놓았는데 어떻게 구처(區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물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물(奠物)은 무람없게 쓸 수가 없습니다. 희생은 양전(兩殿)에 드리고, 쌀과 음식은 단직(壇直)에게 주고 포(脯)ㆍ해(醢) 등의 물품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구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옳다.” 하였다.   

  

국왕은, ‘경칩이 지난 첫 번째 해일(亥日)’에 선농단에서 제사를 모신다. 이날 농사를 직접 짓는 모범을 보인다. 친경(親耕)이다. 조선은 농업 기반의 국가다. 농사가 제일 중요하다. 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인다. 중요한 행사다.


조선 초기부터 ‘경칩 지난 해일’에 선농단 제사와 친경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날짜가 달라지기도 하고, 기후에 따라 날짜를 조정하기도 했다. ‘경칩 지난 첫 번째 해일’은 성종대왕 시절부터 정해진다. 세종대왕의 설렁탕은 애당초 틀린 이야기다. 선농제, 친경, 날짜 등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성종 이후다.


각종 행사 준비, 진행 등이 지금보다 더 엄격했던 시절이다. 국왕이 선농단에 가서 제사를 모시고, 친경을 할 때는 지금보다 더 엄격한 법도가 있었다. 위 문장 중, 두 번째 부분은 제사 후 사용한 물품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여준다.


제사에 사용한 희생(犧牲)은 날고기다. 희생은 양전(兩殿)에 드린다고 했다. 양전은 인수대비와 인혜대비다. 임금의 어머니뻘인 두 분 대비에게 바쳤다. 궁중의 어른들이다. 쌀과 음식은 선농단 관리들에게, 나머지 포(육포, 어포)와 해(젓갈)는 호조가 관리한다.


희생으로 사용한 고기로 국을 끓여서 나눠 먹는다? 임금이 드시는 것도 아니고 궁중 어른 ‘양전’에 바쳤다. 그걸로 국을 끓여서 나눠 먹는다? 불가능하다. 그릇도 없다. 오늘날같이 그릇이 흔한 시절이 아니다. 수십 명에게 밥을 대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장작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마솥은? 그릇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왕이 일을 당하면 환궁(還宮)이 원칙이다. 비가 온다고, 행사에 모여든 주변 서민들과 음식을 끓여서 나눠 먹는다? 동화다. 왕은 아무 곳에서나,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름 없는 서민들과 밥을 먹었다? “그랬으면 좋겠다”이지 사실은 아니다.

설렁탕은 일제강점기, 저잣거리로 나온 음식이다. 그 이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있었던 음식이 길거리 식당에서 팔리는 음식이 되었다. 설렁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다. ‘국왕의 선농단 설렁탕’도 적당한 민족주의, 우리 왕실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 등이 뭉쳐서 일제강점기에 생겼을 것이다.  


몽골의 고기 곰탕, 뼈 곤 국물인 ‘슐루’ ‘술루’와 설렁탕이 닿아 있다는 주장도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것이다. 이 부분 역시 검증되지 않았다. 설렁탕의 유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임금님의 ‘선농단과 설렁탕’은 틀렸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거란의 고려 침략이 그 시작이다. 이때 많은 이민족이 한반도로 몰려든다. 전쟁은 이질적인 문화를 뒤섞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왕래하고 이민족들이 몰려든다. 전쟁 앞잡이든 군인이든 이민족, 북방 기마민족이 농경사회인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중 상당수는 한반도에 남는다. 깊은 산속에서 살아간다.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수렵, 도축을 업으로 삼는다. 화척(火尺), 양수척(楊水尺), 재우척(宰牛尺) 등이다. 때로는 도둑질하고 때로는 동냥한다. 주업은 사냥, 목축, 도축이다. 8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들은 ‘백정(白丁)’이 된다. 더 이상 도둑은 아니다. 천민 신분, 도축하는 자들이지만 한반도의 백성이 된 것이다.


백정은 궁궐이나 지방 관청에 고기를 납품한다. 국가는 소의 도축을 엄격하게 금한다. 쇠고기의 이름이 금육(禁肉), 금하는 고기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에 필요한 고기는 정해진 규정대로 납품을 받는다. 소를 구해주고, 백정들이 도축한 후 정육(精肉)을 받는다. 정육을 납품하고 나면 기름, 내장, 껍질, 머리, 뼈, 피 등이 남는다. 부산물이다. 백정의 몫이다. 백정은 도축으로 국가에 대한 세금, 부역을 대신한다.


고기나 곡물 모두 귀한 시절이다. 부산물이라 하여 버릴 수 없다. 냉장, 냉동 시설이 없었다. 뼈와 기름, 내장, 남은 살코기, 피 등을 보관할 방법은 없다. 삶는다. 국물과 부산물 고기 부분이다. 적당한 곡물을 넣어서 끓여 먹는다. 조선 시대 판 설렁탕이다. 정식 음식이 아니다. 제사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사용해야 음식이 되고 이름을 얻는다. 제사에도, 손님맞이에도 내놓을 음식이 아니니 이름은 없다. 그저 고기, 뼈 곤 국물이다. 서민들은 오랫동안 이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설렁탕과 비슷한 음식이었다.  


언론인 고 홍승면 씨(1927~1983년)는 수필 “백미백상”에서 “설렁탕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는 설렁탕이 내장탕, 소머리곰탕을 겸했다. 선짓국도 있었다. 설렁탕이 우리 시대에 설렁탕, 내장탕, 소머리곰탕, 선지해장국으로 분화했다. 지금도 설렁탕 국물을 고아낼 때 소 대가리의 뼈를 섞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소의 생산, 대일 수출 등이 늘어나면서 한반도에 소 부산물이 흔해졌다고 표현한다. 틀린 말이다. 일제강점기 일정량 소 생산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더하여 조선 시대 엄격하게 금했던 소의 도축도 자유로워졌다. ‘금육(禁肉)’ 정책이 느슨해진 것이다. 반상의 구별도 무너졌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사라지니 육류의 유통, 소비도 자유로워졌다. 일제강점기에 느닷없이 설렁탕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오래전에 설렁탕은 있었다.  


박제가(1750~1805년)의 “북학의(北學議)”에서는 조선 사회의 ‘지나친 쇠고기 선호’를 이야기한다.      


(전략) 중국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한다. 북경 안에는 돼지고기 푸줏간이 72개소, 양고기 푸줏간이 70개소가 있어서 (중략) 고기를 이같이 많이 먹는데도 쇠고기 푸줏간은 오직 2개소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잡는 소를 계산하면 500마리가 된다. 나라의 제향(祭享) 때나 호상(犒賞) 때에 잡는 것, 또는 반촌(泮村)과 서울 5부(五部) 안 24개소의 푸줏간에서 잡는 것, 게다가 전국 300여 고을마다 관에서 반드시 푸줏간을 열게 한다. (중략) 서울과 지방에서는 혼례와 잔치, 장례, 향사(鄕射) 때 그리고 법을 어기고 밀도살하는 것을 대강 헤아려 보아도 그 수가 이미 500마리 정도가 된다. (후략)     


구체적으로, 숫자를 들어 설명한다. 한양은 북경보다 작지만 24곳에서 도축한다. 전국적으로 하루 500마리의 소를 소비한다.


조선 시대 소의 체중이 오늘날의 반 정도(200Kg)라고 가정하자. 소 무게와 비교해 고기의 양은 60~70% 정도다. 정육의 무게다. 하루 소비 쇠고기의 무게는 약 60톤 정도다. 1인당 200g으로 셈했을 때 30만 명이 먹을 양이다. 초정 박제가는 영조, 정조 시대를 살았다. 실학자다. 사신단으로 북경도 다녀왔다. 초정의 기록은 믿을 만하다. 그의 기록대로라면, 일제강점기 100년 전에 이미 쇠고기 소비가 엄청났다.


설렁탕을 끓이기 위하여 소를 도축하지는 않는다. 정육을 얻기 위하여 소를 도축하고, 그 부산물로 뼈, 기름, 내장 등을 얻는다. 버리지 않고 탕으로 끓인다. 설렁탕 혹은 설렁탕과 닮은 국물이다.


설렁탕은 소 도축이 시작되었던 고려 시대에 이미 있었을 것이다. 거란의 고려 침략 시기에 들어온 이민족들이 소를 비롯한 짐승을 도축했다. 부산물을 버리지 않는다. 고깃국물로 먹었을 것이다. 정식 음식이 아니니, 이름도 없었다. 음식점이 없었으니 정식 음식으로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이름 없는 음식이 설렁탕이다. 일제강점기, 이름 없는 음식이 길거리 식당에서 파는 정식 음식이 된다. 일제강점기에 설렁탕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저잣거리에서 정식으로 파는 음식이 되고 이름을 얻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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