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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Nov 06. 2020

꼬막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술꾼들, 술꾼이 아니더라도 겨울이 오면 누구나 꼬막을 그리워한다. 꼬막은 11월부터 3월이 제철이다.  


‘꼬막’이라고 부르지만, 각자 그리는 꼬막은 제각각이다. 꼬막은 혼란스럽다. 여러 종류의 조개를 모두 꼬막이라고 부른다. 참꼬막이 진짜 꼬막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참꼬막이 귀하고 비싸지만, 새꼬막이 좋다는 이도 많다. 실제 소비의 대부분은 새꼬막이다. 너무 비싼 참꼬막 대신 가격이 눅진 새꼬막을 택하겠다는 이도 많다. 탓할 수는 없다. 참꼬막과 새꼬막의 가격은 상당히 차이가 난다. 맛이 그 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다. 참꼬막이나 새꼬막 모두 꼬막이다. 


피꼬막도 있다. 붉은색이 도는 꼬막은 피꼬막 혹은 피조개다. 피조개는 상당히 크다. 크기만으로도 참꼬막, 새꼬막은 피꼬막, 피조개와 구분할 수 있다, 피꼬막도 당연히 꼬막이다.  


정확지는 않지만, 꼬막은, 예전에는, ‘회패(灰貝)’라고 불렀다. ‘회색빛 조개’라는 뜻이다. 참꼬막이나 새꼬막 모두 회색빛이다. 회패가 참꼬막인지 새꼬막인지는 구별이 어렵다. “정확지 않다”고 표기하는 이유가 있다. 불과 수십 년 전의 각종 기록에는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이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모두 회패라고 부르고, 더러는 적패(赤貝)라고도 불렀다. 적패는 붉은 조개다. 붉은색이니 곧 피꼬막, 피조개임을 알 수 있다. ‘꼬막=적패’라는 표현도 있으니 결국 꼬막=회패, 꼬막=적패다.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을 혼동했음을 알 수 있다. 피꼬막은 혈합(血蛤), 즉, 피조개라고도 불렀다. 꼬막, 회패, 피꼬막, 적패, 혈합, 참고막, 새꼬막 등등,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모두 꼬막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9월 13일 조선일보의 기사다.       

 

마산항 내 적패(赤貝) 연산액(年産額) 2만 원/(마산) 마산만 내에는 꼬막(赤貝, 적패)의 산출이 많아 일 년에 이만여 원의 산액이 있는바, 조선수산시험소에서는 그 양육 시험을 한 결과 성적이 매우 양호함으로 장래에 가장 유망한 산물이 되리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부 당국에서는 그 양육과 보호에 매우 힘들인다는데 금년의 어획금해기(漁獲禁解期)는 구월 십육일부터라 한다.     


꼬막을 적패라고 표기했다. 꼬막을 피꼬막, 피조개로 설명한 것이다. 양육은 양식이다. 지금도 참꼬막은 양식이 순조롭지 않다. 조개의 씨앗인 종패(種貝)를 갯벌에 뿌려서 기르긴 하지만 온전한 양식은 아니다. 새꼬막은 양식하지만, 참꼬막은 아니다. 1930년에 참꼬막을 양식했을 리는 없다. 양식했다면 새꼬막 아니면 피꼬막이다. 어쨌든 붉은 조개, 피꼬막을 꼬막이라고 표기했다. 적패, 피꼬막이 곧 꼬막인 셈이다. 


7, 8월은 꼬막의 산란기다. 9월이면 꼬막을 잡을 수 있도록 해금한다. ‘9월 16일의 해금’은 얼추 맞는 내용이다. 


꼬막을 적패라고 표기했으니, 이 꼬막이 피꼬막인지, 새꼬막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꼬막의 원래 이름은 ‘고막’이었다. 유럽의 문인 중에는 음식 관련 책을 낸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드물다. 조선 시대,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을 썼다. 흔히, “조선 시대 맛 칼럼을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라고 부른다. “도문대작”에서 우리나라의 식재료, 음식을 이야기했지만, 교산을 맛 칼럼니스트라고 부르기에는 그 양과 질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도문대작”도 단행본이 아니고, 교산의 문집 “성소부부고”의 일부일 뿐이다. 그 이전, 이후에는 더 상세하고 풍부한 음식 관련 책을 남긴 이들도 많다. 

꼬막 우거지국의 모습.

꼬막이 오늘날같이 유명해진 것은 소설 “태백산맥” 덕이 크다. “태백산맥”의 작가, 소설가 조정래(1943년~ )는 전남 순천 출신이다. 꼬막의 주산지인 여자만도 순천, 여수, 보성, 벌교, 고흥 등을 아우르는 바다다. 행정구역으로는 나뉘어 있으나 여자만을 더불어 품고 있다. 꼬막의 주 생산지는,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고흥반도다. 생산량의 40% 정도가 고흥 몫이다. 소설가 조정래 부친의 고향이 바로 고흥이다. “태백산맥”의 벌교 꼬막 이야기 덕분에 벌교가 꼬막으로 유명해졌다. 꼬막은, ‘지리적 표시제’에 의해서 ‘벌교 꼬막’으로 불린다. 꼬막 주산지인 고흥 사람들이 아쉬워한다는 말도 들린다. 고흥반도에서 내륙으로 가자면 반드시 벌교를 거쳐야 한다. 교통 요지인 셈이다. 고흥에서 많이 나오는 꼬막이 벌교 꼬막이 된 이유다. 벌교는 꼬막의 집산지다.  


꼬막과 관련한 소설가 조정래 씨의 공은 따로 있다. 원래 이름인 ‘고막’ 대신 ‘꼬막’이 표준어가 된 것은 소설 “태백산맥” 덕분이다. 소설가 조 씨가 원고에 고막 대신 꼬막이라고 표기했다. 출판사의 교정 과정에서 꼬막을 고막으로 고쳤지만, 작가가 “현지에서는 ‘꼬막’이라 부른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꼬막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유명세를 타고, 1천만 부 이상 팔리면서 꼬막이 표준어가 되었다.  


꼬막이든, 고막이든,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을 가른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 꼬막 양식과 관련한 내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전히 꼬막을 섬세히 나누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다. 일본은 서구의 수산물 양식 기술을 도입하여 많은 양의 수산물을 양식, 재배했다. 한반도 착취를 위하여 한반도에도 자신들의 양식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중국, 대만, 만주, 한반도를 대상으로 생산물을 수출, 수입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한반도의 질 좋은 농수산물을 ‘일본 산’ 딱지를 붙여 중국, 대만으로 수출했다. 거꾸로 중국 대륙이나 만주 등의 생산물을 한반도나 일본으로 수입했다. 


해방 후인 1949년의 신문 기사에서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꼬막의 생산, 수출 등에 관한 내용이다. 해방 후에도 일본은 수출 지역을 비밀에 부쳤다. 


경향신문 1949년 5월 1일의 기사다. 좌담회 내용이다. 한국 수산업 발전, 일본의 횡포 등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약진한국수산좌담회 
(전략) 더욱이 한국 산업부문은 일제의 기반하에 여지없이 유린당하여 기형아가 되어버리고, 해방이 된 이땅은 정계의 혼란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중략) 어찌 무진장의 보고인 삼면해를 간과할 수 없으며 수산건국을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일본의 헌법정치는 한국수산물을 자국생산물로 포장하여 감즙을 빨아왔고 (중략) 해외시장을 극비에 붙이어 그 교활한 중간착취를 계속하고 있다는 실증을 금반 확실히 파악하게 된 것이다. (중략)

본사: 외자를 획득할 또 다른 좋은 자료는 없었습니까?

정문기 씨: 꼬막(灰貝)입니다. 원래 일본 강산 현(岡山灣, 오카야마 겐)에 대량양식장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십수 년 전 전남 여자만(汝子灣)에 유명한 양식장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수출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부터 그 판로를 알려고 애를 썼으나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종내 몰랐는데 대략 복건성인줄 짐작한 것이 이번에 알고보니 아모이(廈門) 근처 일대였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血蛤이라고 부르는데 일종의 미신으로 음력 정월 보름 전후에 한번 먹으면 풍토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음정초(陰正初)에 보내면 한국산 오백석 가량은 문제없이 팔립니다. 

     

자료에 등장하는 ‘정문기 씨’는 당시 기획처 경제계획관이었다. 경제기획관이 신문사 개최 수산 좌담회에서 꼬막 양식, 수출 등에 대해서 답한다. 정문기 계획관의 대답 속에 ‘여자만의 꼬막 양식장’이 등장한다. 


오카야마 앞바다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세토나이카이)다. 일본에서 질 좋은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고, 양식장도 많은 곳. 일본은 처음에 오카야마의 양식장을 통해서 꼬막을 길렀으나 무슨 이유인지 양식장이 사라진다. 새롭게 만든 양식장이 바로 여자만이다. 지금도 대부분 꼬막은 여자만 일대에서 양식한다. 


1949년의 기사에서 ‘십수 년 전’이라고 했으니 1930년대다. 조선일보 1930년 기사와 같은 내용이다. 조선일보 기사의 ‘마산 적패 양식’은 꼬막 양식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여자만이나 마산 등 남해안 일대에서 여러 차례 시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음정초’는 음력 정월 초순이다. 꼬막은 늦가을, 초겨울에 채취를 시작하고, 2, 3월경에 끝난다. 시기적으로도 맞다. 

참꼬막과 새꼬막, 그리고 피꼬막.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꼬막은 다른 조개와는 달리, 껍질에 깊은 줄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꼬막을 와롱子(瓦壟子)라고 불렀다. 꼬막의 깊은 줄이 마치 기와지붕의 골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깊은 줄의 이름은 방사륵(放射肋)이다. 마치 심줄처럼 뻗어 있다. 


방사륵의 숫자로 꼬막을 구분할 수 있다. 참꼬막은 18개 전후, 새꼬막은 32개 전후, 피꼬막은 42개 전후의 방사륵을 가지고 있다. 참꼬막의 방사륵 수는 적지만, 홈이 깊다. 


참꼬막, 새꼬막은 회패(灰貝)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껍질의 색깔이 잿빛이다. 피꼬막은 붉은색을 띠고, 가는 털들이 보인다. 크기는 참꼬막, 새꼬막, 피꼬막 순서다. 피꼬막은 다 성장했을 때 크기가 달걀보다 크다. 참꼬막은 제일 작지만, 맛은 가장 깊고, 배릿한 바다 내음이 한결 강하다. 


새꼬막, 피꼬막은 대량 양식이 가능하다. 어선으로 대량채취한다. 선박에 큰 쇠스랑 같은 것을 달고, 쇠스랑으로 바다 바닥을 훑는다. 


참꼬막은 여전히 일일이 손으로 잡아야 한다. 그나마 ‘널배’를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참꼬막을 잡을 수 있다. 널배는, 널따란 판자다. 판자에 엎드린 채, 한발을 판자 위에, 다른 발로 갯벌을 밀면서 가는 식이다. 널배에 웅크리거나 엎드린다. 꼬막 채를 쥐고 갯벌을 돌아다니면서 참꼬막을 떠올린다. 


“태백산맥”의 참꼬막은 일일이 손으로 캐고, 줍는 방식이다. 양력 정월이나 2월, 물이 한참 찰 무렵, 갯벌에 발을 묻은 채 꼬막을 캔다. 힘든 일이다. 갯벌에 빠진 발목은 끊어질 듯이 아프다. 참꼬막은 지금도 일일이 손으로 캐고 주워야 한다. 참꼬막은 성장 기간도 길다. 새꼬막이 2년, 참꼬막이 4년 걸린다. 참꼬막이 비싼 이유다.


다른 조개와는 달리 꼬막은 삶은 후에도 껍질이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조갯살이 드러나면 산화작용 때문에 맛이 달라진다. 향긋한 바다 내음도 사라진다. 꼬막을 까는 별도의 도구도 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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