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에 물린 썰
지네야, 네가 날 물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친정집에 갔다가 지네에 물렸다. 세상에 지네에 물리다니. 자연과학 과목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었던 나는 지네가 사람을 문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또 지네가 야행성 동물인 것도. 내가 지네에 물린 시각도 자정을 넘긴 새벽이었다. 그런데 지네에 물린 이 사건으로 나는 “엄마는 엄마네”라는 말을 친정집과 남편에게 길이길이 듣게 됐으니 이유인즉슨 아들이 물릴 뻔한 지네에 내가 물렸기 때문이다.
아들 대신(?) 내가 지네에 물리게 된 정황은 이랬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뵙고, 부산한 하루를 보낸 뒤 나와 아이들은 넓은 거실에 이불을 펴고, 옹기종기 누워 자기로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정 무렵 잠이 깬 뒤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불 꺼진 천장을 끔벅끔벅 쳐다보다가 아이들을 보는데 둘째 아이의 잠자리가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을 안아 내가 누웠던 자리에 누이고, 나는 아들이 누웠던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 이불을 고쳐 덮는데 갑자기 엄지발가락 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전기가 감전되면 이런 느낌일까? 처음 경험해보는 고통이었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고함이 나왔지만, 아이들이 자고 있어서 서둘러 입을 막았다.
쥐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라 여기며 5분 여를 버텼다. 그런데 몸 상태가 점점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엄지발가락 통증은 이제 허벅지에서 골반 옆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남편을 깨웠다. 장거리 운전에 지친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숙면 중이었다.
“여보, 나 발이 이상해. 너무 아파”
“....어어?”
남편을 깨워 화장실에 불을 켠 뒤 발을 보니 발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통증은 점점 심해져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남편이 어딘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인듯했다.
“저, 갑자기 자다가 발이 아파서 보니까 빨갛게 붓고, 통증이 심해서 힘들어하는데. 아, 네네.
네네 ”
전화를 끊은 남편이 말했다.
“지네에 물린 것 같다는데 일단 응급실에 가자”
그렇게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아이 둘도 깨버렸다. 엄마 아빠가 나서는 걸 보자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아이 둘을 데리고 차에 탔다. 친정엄마는 우리를 마중하며 거실 이불을 다 뒤집기 시작했다.
다행히 차로 30분 거리에 응급실이 있었다. 도착해서 접수하자, 2층 계단에서 잠에서 막 깬 젊은 의사가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 내려왔다. 상황을 설명하자, 벌에 쏘였을 때 맞는 주사를 맞아보자고 했다. 그것도 두 번. 주사를 맞고, 알레르기 반응을 완화해주는 약을 응급실에서 직접 주었다. 그렇게 주사를 맞고 약을 먹자 조금씩 통증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통증이 사라지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 둘은 비몽사몽간에도 밤 외출이 신나는지 아빠에게 매달려 장난을 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 집이 환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안방에서 주무시던 아빠까지 깨서 거실에 나와 계셨다.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냐고 하셨다. 엄마는 거실 이불을 다 털고, 새로 깔았다며 어떻게 지네가 있을 수 있느냐며 내게 물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몰라 가족이 모기 기피제를 다 뿌리고 다시 잠이 들었고, 다행히 아침까지 무사히 잠을 자고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니 한결 낫긴 했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있었다. 무엇보다 간밤의 소동으로 잠을 설친지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또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엄마는 딸내미가 친정집에 내려와서 고생만 하다 가는 것 같아 맘이 좋지 않은지 보낼 때까지 얼굴이 편치 않았다.
“내가 물렸으니까 망정이지 둘째가 물렸으면 진짜 위험했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나마 그 말에 엄마는 안심했다.
그렇게 속이 편치 않은 엄마가 준 반찬을 바리바리 싣고, 친정집을 나선 지 20여 분 뒤,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엄마가 하는 말
“잡았다. 그놈!”
엄마가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외쳤다.
“...?뭐 지네?”
“응. 잡았다. 하이고, 크더라. 에어컨 뒤에 숨어있었는데 잡아서 죽였다”
그러자 남편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어? 장모님, 그러면 그거 사진 하나 찍어서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이 와중에 호기심이 발동된 남편이었다.
“와?”
엄마가 물었다. 이과생 남편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하하”
‘어이구? 아직 안 피곤한가 보네’ 나는 생각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보자마자 내가 토막을 내서 냅다 버렸는데”
안 봐도 훤했다. 엄마는 지네를 보자마자 ‘니가 내 딸 물어서 그렇게 만들었냐, 두고 봐라.’ 그런 마음으로 성정에도 맞지 않는 살생(?)을 저질렀을 것이다. 나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어쨌든 그 뒤로 친정집은 한옥을 개조해서 나무가 있는 집에는 지네가 산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네 퇴치 약을 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나는 지네에 물리면 정말 아프다는 것을 절절히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내가 통증을 느끼는 중에도
‘아들이 안 물려서 천만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것이다. 모성애라는 것이 이토록 놀라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기특하기조차 했다.
여하튼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고, 내가 물려서 앞으로 친정집은 지네 퇴치 약을 달고 살게 된 것도 다행이다. 여러모로 나를 문 지네가 밉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러 선택지 중에 날 택해서 그나마 고맙기도 하고, 그렇게 유명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애석하기도 하고, 그렇다. ㅎ
지네야 잘 가라. 부디 친구들에게 우리 친정집에는 가지 말라고 해주길.
지네에 물리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라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남겨본다. 지네 물린 썰. 끄읕. ㅎ
(한옥 개조해서 사시는 분들은 '지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