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새 Dec 11. 2023

고속도로와 지름길을 사랑하지 마라

아내와 여행을 다닐 때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고속도로는 천천히 가며 길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는 데다가 최저 속도가 80km라 앞뒤 차량의 눈치를 보며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높다. 국도는 신호가 많고 느리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경유해야 하는 여러 지역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어서 쉬엄쉬엄 국도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야간에는 국도변에 가로등이 많이 없어서 위험하고, 경치도 볼 수 없어서 국도로 이동하는 의미가 없어지지만 말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다가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많은 일들을 돌이켜 보면 나는 고속도로를 사랑했던 것 같다. 고속도로는 목적지까지 빨리 가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다. 프로그래머, 오디오카페, 푸드트럭, 공무원시험... 


친구와 함께 홈페이지 제작 일을 하며 시작한 웹 프로그래밍은 좀 더 근본적인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싶은 욕구로 발전했고 C 언어 책 두 권을 나름대로 뗐지만, 수학적인 한계가 오는 것 같아 (응용프로그래머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오디오카페는 고급진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근사한 카페의 사장이 빨리 되고 싶어서 동업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화가 되어 막심한 손해만 보고 물러났다. 푸드트럭은 예쁜 트럭에서 재미나게 내 사업을 하는 상상만 하며 시작했지만 막상 현실은 노점의 여러 애로 사항에 부닥쳤는데, 그런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뒀다. 공무원시험 역시 단 한 번의 시험에 올인했던 게 무리였던 것 같다.(영어가 단기간에 힘들더라)


나는 왜 그토록 고속도로를 사랑했을까? 빨리 가고 싶어하고 결실을 보여주려 안달했을까? 고속도로를 사랑하는 이유는 목적지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반대로 국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그 경로(과정) 역시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여행을 다니면 목적지의 주요 관광지도 나쁘지 않지만, 국도변의 의외의 장소에서 신선한 여행의 기쁨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 게 또 여행의 맛 아닌가.


내가 정말 프로그래밍을 사랑했다면, 그 일을 하는 내가 좋았다면 진득이 공부를 더 했을 것 같다. 수학적인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핑계는 뒤로 미루고, 좀 더 쉬운 프로그래밍 책을 사보든 학원에 다니든 수를 모색했을 것이다. 오디오카페의 사장이 정말 되고 싶었다면 돈 많은 친구와의 동업보다는 착실하게 가게 열 자금을 모았으리라. 푸드트럭 역시 푸트트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수제차를 파는 내가 좋았다면 노점의 여러 애로 사항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박근혜 정부 때는 실제로 푸드트럭 합법화 정책도 진행이 됐으니까.


진정한 여행보다는 인스타에 올릴 사진에만 관심 있는 누군가처럼 나도 실패했던 많은 일들에 대해 진정성과 애정이 부족했던 것 같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과 결과에만 집착했다. 내가 애정이 곧 재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정이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한다. 나는 피아노도 서툴고, 음악이론도 부족하지만 좋은 곡을 쓰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계속 공부를 하고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할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댄싱다연'을 한번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고속도로는 고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주의를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운전 피로도도 높다. 연료비도 많이 들고 통행료도 든다. 우리가 재능을 고속도로에 태우려고 하면 이런 모든 위험도와 피로도가 상승한다. 인간의 의지력과 체력은 당연히 한계가 있고, 매우 허약하다. 재능과의 여행은 장거리 여행이다. 휴식이 필요하고, 재능이 바로 내가 사랑했던 일이었다는 초심- 주의 환기 - 도 자주 필요하다. 이런 환기가 없으면 주객이 전도되어 집착이 되어버리는데, 재능을 고속도로에 태우려다 보면 쉽게 이런 집착에 빠지게 된다.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마치 목적지에 빨리 가야 하는 숙제처럼 돼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모처럼 부부끼리 여행을 갔다가 대판 싸워서 돌아오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내가 지난 삶에서 겪었던 수많은 실패의 원인이었던 고속도로와 지름길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이런 마음이 삶의 원리와 운에도 반한다는 걸 많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재능 - 내가 사랑하는 일 - 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결과(목적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국도를 통해가는 여행처럼 그 자체를 즐기면 된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일이라면 결과는 차치하고 안 할 이유가 없다.


한국사 강사 이다지도 지금은 일타강사지만 젊은 시절 2년간 증권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자기에게 맞지 않았다고 한다. 신동엽도 한때 사업에 실패하고 지금은 방송에 전념하는 걸로 아는데, 개그가 그에게 정말 잘 맞는 옷 같다.


결과를 빨리 내라고 독촉하는 세상에서 느리게 가기가 어색하고 뻘쭘할 것이다. 그래도 그런 떳떳함과 당당함을 지녀야 한다.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할수록 일이 꼬인다는 걸 다들 아시지 않나. 국도로 가야 허름한 집이나 가게도 보이고, 노면이 안 좋은 길도 보인다. 즉 남을 돌아볼 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고속도로로, 지름길로 빨리 성취하고 출세하면 그런 배려심을 배울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음악과 글 - 문화예술 - 을 내 재능이라 믿으며 좀 천천히, 여유 있게 가려 한다. 목표 없이 가겠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는 <최소한 1곡을 팔겠다>는 목표를 곧 새해(2024년) 목표 적을 때 칠판에 적어둘 것이다. 270일 동안 하루 70분 피아노 연습을 올해 이뤄냈기 때문에 - 2023년 1번 목표였다 - 내년에도 구체적 목표를 적고 이룰 것이다.


가는 여정이 국도처럼 느리고 신호가 많고 노면이 울퉁불퉁해도 그 여정을 즐겨보려 한다. 돈 많은 신동엽도 생라면에 스프 뿌려서 소주 마시는 거 보면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내가 곡을 드디어 팔았다고 인생이 확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일하고 밥먹고 똥싸고 잠자고 사람 만나고 그러면서 살 것이다. 결국 즐기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게 아닐까.


요즘 유튜브에서 핫한, 이소라와 신동엽이 만난 영상에서 이소라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헤르만 헤세인데 헤르만 헤세가 「황야의 이리」라는 소설을 쓰면서, 정말 자기 삶의 가장 힘든 일 여러 가지를 다 쓰면서, 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딱 한 가지는 유머라는 거야. 유머." 


좀 유머러스하게 재능과 함께 가 보자. 어깨와 손목, 손가락에 힘 들어가면 피아노에서 예쁜 소리가 안 난다. 삶도, 재능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전 13화 나는 날마다 모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