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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짐을 지고 가는 즐거운 나그네

by 밤새

저 생은 모르겠지만 이 생에서 짐이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낸다 해도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씻어야 한다. 실상은 훨씬 더 많은 책임과 역할과 세상사의 변수 속에서 산다. 얼른 부자가 되어서 생계를 비롯한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돈벌이에 목을 매어 보지만 성공 이후의 경제적 능력이 모든 걸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기꺼이 짐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이 삶에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펜션에 가족 나들이를 가면 '요리와 설거지는 기꺼이 내가 하겠다'는 남자들의 마음이 필요한 것처럼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 마구 섞여 있는 인생사에서 최소한 몸은 부지런을 떨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누구 못지않게 자유주의자요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 생에서 완전한 자유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우선 우리는 육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육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하고 쇠하고 퇴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위에 군림할 만큼 세력이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다. 또 가장 가까운 가족을 비롯한 세상사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이런 기본적인 제한 속에서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된다 한들 완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역할에 충실하고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인간상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역할과 책임만 남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은 앙상하고 삭막하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뛰어놀기와 같은 순수함이 있을 때 어른의 삶도 윤이 나고 아름답다.


자유에는 하지 않을 자유도 있지만 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돈을 많이 벌면 일하지 않을 자유는 얻을 수 있지만,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자유는 돈만 많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매일매일 연습이라는 짐을 꾸준히 지고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 나의 영혼과 이웃의 영혼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는 것, 이를 위해 날마다 연습이라는 짐을 지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 기꺼이 필요한 짐을 지는 삶에 적합한 비유다.


삶의 짐은 우리 모두 다 다르다. 마음의 상처, 현실적인 빚, 괴롭히는 가족, 불의의 사고, 불치병, 고질병, 가난, 다니기 싫은 직장, 안 좋은 습관... 이 모든 것이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물론 고통이 큰 분들에게 '기꺼이 그 짐을 지시오'라고 쉽게 말할 순 없다. 다만 어떻게든 짐을 벗으려는 이기적이고 얄팍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과거에는 한 가지에만 몰입하면, 3년 정도만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성공하고 신세계가 올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내게 완벽히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 않는 운명을 원망했다. 가난한 부모님, 속썩이는 자식 등 내게 주어진 현실이 짐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몰입과 집중이 중요하긴 하지만 세상사엔 운이란 게 있고, 누구도 진공상태 같은 완벽한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또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가 줄곧 신세계일 리도 없다.


그래서 이제는 기꺼이 짐을 지고 가면서 음악도, 글도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출세하기 위함이 아닌 내 영혼의 벗으로서 음악과 글을 대하는 거라면 부족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꿋꿋이 해나가면 된다고 말이다. 최근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로 음원차트 돌풍을 일으킨 가수 황가람처럼 인생 역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나름대로 음악과 글을 계속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사실 지금 현재의 여건도 신의 상당한 은혜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큰 지병이 없고, 자식들이 독립해서 크게 애먹이지 않고, 아내와 내가 그럭저럭 건강하며, 직장의 업무가 과하지 않아서 나름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음악과 글에 쏟을 에너지가 어느 정도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짐을 지고 가는 즐거운 나그네가 되기로 한다. 짐이 즐겁진 않지만 짐은 타인에 대해 애정과 측은지심을 가지기에 꼭 필요한 요소인지도 모르고, 또 어떤 짐의 유무는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니까 받아들이기로 한다.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모른 채 항상 웃고 친절한 AI 로봇이 아니라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가는 인간이니까. 짐을 지고 아픔을 간직했지만 웃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이니까. 그런 미소가 깊이 아름다운 미소이니까.



※ 혹시 기다리신 독자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연재를 오랫동안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꾸준히 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네요.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힘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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