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생존기 15화.

코로나와 함께, 네팔에서

by 브랜디Cake

인명은 재천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위험천만함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일상을 살아가다 부딪치는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 예를 들면 날벼락이나 지진, 비행기 사고 등에 조금 의연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를 펜데믹이라 선언 했을 때도, 내가 살고 있는 국가에 산소호흡기가 500대를 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1일 확진자가 3천명을 웃돌지만 6개월간의 이동제한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어 이동제한을 풀던 네팔정부를 볼 때도 나는 걱정은 해도 동요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는 스멀스멀 내 주변을 기웃거렸다. 얼굴만 아는 누군가의 감염 소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같은 건물 내 근무자가 확진이 되고 동료의 친척이 감염되어 사망하는 등 조용하게 그러나 무섭게 코로나는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석해서 간단히 다과를 함께한 사람이 확진이 되었고 나도 PCR테스트라는 것을 받기에 이르렀다.


코로나 이기주의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업무상 식사는 가능하다면 점심시간에 하고 저녁식사는 응하지 않는다. 최소한 먹을 때만은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이기도 하고 한 끼라도 불편하게 먹고 싶지 않은 욕심이기도 하며 불편한 식사를 하면 꼭 채하는 체질이기도 하다. 요즘은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코로나로 타인을 만나거나 식사하는 것을 꺼린다. 이 사람 정도면 내가 아파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싶은 사람, 즉 가족이나 친구, 연인 이외에는 서로 식사를 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로 이동제한이 풀리고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몇몇이 동석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와 다과를 함께하게 되었다. 장기간의 코로나로 모두 지쳐 있었고 누구하나 거절하기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3-4시간의 모임 끝에 각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중 한명이 그날 저녁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 아닌가. 기분 탓인지 그날 저녁부터 37.5도가 넘는 열과 눈알이 튀어나올 듯 한 두통으로 한 사나흘 고생했다. 아픈 몸으로 휴가를 내고 집에 누워서 조심했어야 했다고 후회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의 면역력을 믿으며 집에서 조심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확진을 받은 사람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방역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라 무증상자는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본인 스스로가 주변에 알리고 경계하지 않으면 무한히 전파가 가능하다. 최소한 본인이 확진자라면 2-3일 사이에 만난 사람들에게는 알려줘서 더 큰 위험을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다행히 내가 그날 그의 확진 소식을 다른 경로로 알 수 있어서 직장 동료 등 내 주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었다. 5일정도가 지나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전화로 안부를 묻는가 싶더니 자신은 아무 증상이 없으며 자신과 식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여 달라는 말을 에둘러 했다.


인간이기에 내가 전파자가 되어 비난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 또한 펜데믹 상황에 누구를 비난할 마음도 그럴 용기도 없다. 대놓고 분출하지 못하는 후회와 원망을 내속에 담으며 내 마음 불편한 것이 내 몫이듯 나로 인해 모두가 아픈 것 같은 죄책감 역시 그의 몫임에도 그는 도망가려 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어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연약한 사람일 뿐이고 겁이 많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코로나19로 또 다시 내 몸에 연약함을 깨 닳는 동시에 인간의 나약함을 직면하게 된다.


집에 대한 생각

넓은 집에 대한 열망은 없었다. 요가매트 펼 수 있을 만한 공간과 욕조가 있으면 충분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카페, 도서관, 미술관 등에서 보내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런데 6개월간의 이동제한과 재택근무를 지나오면서 집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카트만두에 살면 정부의 봉쇄령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이동을 제한하며 살게 된다. 편안하게 걸어 다니기에는 땅에 개나 소 그리고 그들의 분비물이 너무 많다. 고개를 조금 들어 나무를 보면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이동하는 원숭이들로 깜짝깜짝 놀란다. 더불어 까만 먼지와 배기가스 냄새로 숨쉬기 힘든 것은 덤이다. 카페는 사람이 많거나 냄새가 나거나 음식이 맛이 없거나 등등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고 아름아름 찾아간 미술관은 ‘1인 감상‘의 사치를 누릴 수는 있지만 적은 작품수와 많은 모기떼와 싸워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스스로 감금 생활에 이미 익숙해 있었다.


코로나19가 등장하고 하루 24시간을 집에서 6개월간 보내면서 나는 회사에 가깝다거나 도심과 가깝다거나 집값의 미래 가치가 어떻다는 등으로 집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집안의 공간은 물론 채광, 천장의 높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창문 등이 집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타인과는 컴퓨터 화면으로만 만나는 세상에서 혼자서도 우울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살아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졌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카페나 도서관 생활은 예전처럼 쉽지 않을 것임으로 집은 쉬는 공간이자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는 공간이자 미래에 만날 누군가와 같이 따로 또는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이동금지가 선사한 가치


네팔은 코로나 2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3월 24일 밤, 전격적으로 전국 봉쇄령을 실시했다.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한밤중에 내려진 조치로 업무를 재택으로 돌리고 각종 보고와 직원들과의 연락망을 확인하는 등 업무에 정신이 조금 없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락다운 시행 1일차 아침.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조용한 아침이 찾아왔다. 차의 이동도 사람의 이동도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춰진 듯 한 날이 찾아온 것이다. 왠지 상쾌했다. 이방인으로 이곳에 살면서 사재기 등의 유혹이 있을 만도 한다. 나는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기초적인 식량이 있었고 원래부터 과일과 야채 이외에는 식품을 현지에서 사지 않았으며 현지 시장이긴 하지만 아침시간대에 식료품을 구할 수 있다고 듣고 있었다. 아마 더 큰 이유는 2014년 대지진 때도 사재기는 없었다는 경험자의 증언과 TV를 통해 전해오는 타 국가의 사재기에 대한 나의 반감이 덧붙여 진 것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싶은 이유가 가장 크다.


락다운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이 요리의 시작이다. 나는 주로 외부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집에서는 과일, 과자, 빵 등의 간식류를 먹던 사람이다. 익숙하지 않은 요리는 항상 나에게 부담이었고 요리 준비와 과정, 사후 처리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했다. 1인분을 만들고 남은 재료들을 항상 버리게 됐으며, 1인분보다 많이 만들어서 먹다가 후회하는 일들이 생기기 일쑤였다. 이곳에 와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라서 입에 맞는 음식이 없었음에도 대충 샌드위치 등으로 염분과 칼로리를 채우고 집에서는 과일을 배불리 먹었다.


락다운이 시작되고 과일과 야채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현지 시장에 아침 7시에 나가서 현지인과 섞여서 과일과 야채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락다운의 의미가 무엇인가 모두가 모이는 것을 제한해서 전염병의 전파를 막아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아침 장보는 시간이 제한되니 모두가 그 시간에 나와 장을 봄으로서 시장은 평소보다 붐빈다. 더불어 현지 시장에는 내가 무서워하는 큰 개들이 즐비하다. 한번 사올 때 마다 잘 썩지 않는 감자, 양파, 마늘 등만을 사게 되었고 무언가 만들어야 했다. 유튜브를 찾아서 봐가면서 요리를 시작했다. 물론 모든 재료가 다 있지 않아서 망설이기도 하고 맛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무언가 만드는 기쁨이 있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나 핸드폰만 보다가 별 생각 없이 무언가를 손질하고 자르고 볶고 하는 재미가 생겼다. 또한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의 구성요소를 내가 모두 안다는 사실의 의미를 깨닳게 되었다. 떡볶이에 이렇게 많은 설탕이 들어가는 구나부터 부치기에 이렇게 많은 기름을 쓰는 구나 하는 기초적인 사실들이 흥미로웠다. 출근을 다시 시작한 지금은 다시 아침에는 바빠서 저녁에는 피곤해서 요리랑은 전혀 연이 없게 되었지만 주말에는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보다는 내가 손수 만든 식탁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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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다운이 두 달여 지속되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락다운 이후로 나에게 허락된 3평남짓의 베란다에 매일 나가는 나는 매일 달라지는 공기의 변화에 놀랐다. 그제서야 길가의 가로수가 먼지로 힘들어하기 보다 본연의 녹색을 발연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집으로 숨어버린 곳에는 자연이 돌아오고 있었다.


직장인 16년차에 처음 경험한 재택근무는 신세계다. 출퇴근 준비와 이동시간이 없어지자 아침시간이 여유로워졌고 시간에 쫓겨 대충 먹거나 거르던 아침식사를 충실히 챙길 수 있었다. 사교적인 인사, 잡담, 전화 등이 사라진 자리는 온전하게 업무에 집중하고 빠른 시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날은 내 업무가 거대한 코끼리에 어디쯤 해당하는지 막연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때면 메신저를 열거나 화상회의를 통하여 동료와 회의를 진행하며 정보나 아이디어 교환을 할 수 있었는데 이때 회의는 출근해서 진행하는 수많은 회의보다 반가웠고 효율적 이였으며 짧아서 좋았다. 불편한 사교적 점심 대신 반찬은 없지만 소화 잘되는 집 밥이 좋았다. 때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오히려 야근을 하기도 하고 마감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괜한 오해를 살까봐 오히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토요일에 업무를 하는 일도 있었으나 재택근무가 주는 유용함에 푸욱 빠져버렸다. 그동안 그렇게 말하던 일과 삶의 발란스를 맞추기에 재택근무만한 제도가 없지 싶다. 사람에 따라서는 장소를 이동하거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업무에 효율도 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집에는 아이들이 있어 근무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어떤 것이 되었건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근무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시작점이 아닌가 싶으면서 어쩌면 코로나19가 그 시기를 성큼 앞당겨 주어서 감사하기도 하다.(물론 전염병으로 인한 엄청난 수의 인명 피해를 간과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난하지만 사재기 없고 굶어 죽지 않는 곳

락다운이 5개월차를 넘어가면서 누군가는 가난한 현지인들이 굶을까 걱정했다. 그에 대한 여러 사람의 일관된 답변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동제한으로 회사도 못가고 장사도 못하니 돈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부터 집에서 채소를 기르고 닭을 키우는 삶이라 굶어 죽지 않는다’. 평소에도 내 집 앞에서 자라는 상추, 고추, 오이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해먹던 사람들은 락다운이 불편하고 돈이 안 벌리기는 해도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락다운이건 대지진이건 사재기라는 것이 없다. 어차피 이들에게 마트 물건이란 생활 편의품이지 필수품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마트에서 조달하고 플라스틱 봉지, 휴지, 생리대 등 일회용품 없이는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락다운이 두렵고 따라서 사재기라는 것을 하게 되는 듯하다. 지금까지 나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경제적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면 회사에 내 시간을 주지 않아도 되고 내가 살고 싶은 장소를 마음대로 바꾸며 갖고 싶은 것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다.


2019년 코로나19의 봉쇄령에 대응하는 전세계 사람들은 지켜보면서 소득수준이 나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칭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하는 나지만 주변에는 플라스틱으로 가득하고 아직도 내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로 미어진다. 은퇴 후 농부가 된 아빠가 있음에도 모기에 물릴까 벌레에 맞닥뜨릴까 밭에 제대로 발도 못 디딘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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