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생존기 14화.

카트만두 일상

by 브랜디Cake

히말라야 타운의 아침

아침형 인간은 아니지만 나는 아침을 좋아한다. 보통 4시에서 5시 사이에 눈을 떠서 커피를 내린다. 아직 어두컴컴한 베란다 문을 열고 먼지가 덜한 날이면 커피를 들고 베란다에 나가 새벽 공기를 만끽한다. 거실 동쪽 베란다 앞으로 배치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새벽 개 짖는 소리, 새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아침 일기를 쓴다. 잔의 커피가 줄어가며 카페인이 몸을 깨우기 시작할 때면 요가를 시작한다. 1만보는커녕 1백보도 걷지 않는 일상에서 하루 1시간만이라도 몸을 움직이고자 계획했으나 책에 정신이 팔리거나 뜨는 해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채 20분도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따뜻해진 몸을 더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한국 뉴스를 적당히 들으며 출근을 한다.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은 내가 직장인이라는 증거다.


출퇴근과 교통경찰

출근길은 보통 25-30분 정도 걸린다. 한국 같으면 출근 치고는 가까운 거리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불량한 도로와 넘쳐나는 차량 및 오토바이로 5km이내도 30분은 거뜬히 걸리는 지라 대부분 사무실 주변에 사는 경우가 많다. 한국으로 치자면 집은 서울이고 회사는 수원쯤인 지라 처음 이곳에 터전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출퇴근으로 하루 2시간가량을 불량한 도로위에서 보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고 출퇴근은 항상 피곤했다. 포장인 듯, 포장 같은, 포장 아닌 그런 도로에서 위아래, 좌우로 흔들리며 멀미로 속이 울렁거리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오래 이곳에 계신 분들의 말에 의하면 매년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로 내가 이득을 본 것은 이런 출퇴근 시간이다. 차량 2부제로 도로가 한산해 진 덕에 매일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카트만두 극한의 직업 중 하나가 교통경찰이 아닐까. 아직도 신호등 체계가 없는지라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의존해 차량이 오고 간다. 잘빠진 제복을 입고 무표정한 수신호를 보내는 모습은 질서 있고 멋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길 한복판에 서서 먼지와 배기가스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코로나 시국에도 차량 통제에 힘쓰던 교통경찰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확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통경찰은 이곳에서 극한의 직업이다.


병원 방문기

외국 생활의 불편사항 중 하나가 병원 방문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료기술이 뛰어난 나라에서도 병원 방문은 극도로 기피하는데 네팔에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상약을 바리바리 챙기고 한국 방문시 마다 병원투어를 하면 2년은 무리 없겠다 싶었다. 나의 계획에 착오가 생긴 것은 온전히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로 귀국은커녕 시내 이동도 어려웠고 비상약들은 줄어들고 있었다.

중요한 회의가 있던 아침. 꼭 이렇게 중요한 일이 있는 아침에 눈은 항상 말썽이다. 눈두덩이 안쪽에 결석이 불쑥 튀어나와 동공을 무자비하게 긁고 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보통은 안과에 가면 능숙한 의사선생님의 손놀림으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눈이 편안해진다.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입자를 내 손등에 올려 주시며 나를 속 시원하게 해주시곤 한다. 그러나 그 전에는 세상 불편하다.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나고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는 상태가 지속되어 일은 커녕 일상생활도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아시아 최빈국이라고 의료봉사단의 천막 같은 병원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처럼 번듯하게 지어진 대형 종합병원이 꽤 여러 곳이 있고 병원 돌아가는 시스템도 한국과 동일하다. 나의 증상이 이곳 의사선생님에게는 이례적인 것인지 한국처럼 시원하게 단숨에 해결하진 못했고 10분 여 분간의 사투 끝에 결석 제거에 성공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처방받은 연고가 한국에서 쓰던 것과 동일함을 알아채고 나는 집 옷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나고 있는 무수한 약들을 떠올리며 쓴 웃음 지었다. 네팔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 의사를 만나거나 약을 먹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살던 내가 오늘을 계기로 조금 더 가벼워진 기분이다.


최대 명절, 더 샤인(Dashain)

더 샤인(Dashain)은 네팔 최대명절로 힌두 전쟁의 여신 두르가(Durga)가 악귀와 싸워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우리나라 설과 추석 같이 네팔력으로 기념되는 지라 매년 9월과 10월경쯤에 위치한다. 전통적으로 15일 동안 치러지는데 요즘에는 많이 축소되어 국가가 지정하는 공휴일은 단 5일이다. 명절답게 카트만두와 같은 대도시에서 살다가 모두 부모형제를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 샤인을 앞두고는 시내에 개나 소보다도 염소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염소는 신에게 바치는 재물이자 온 가족이 나눠먹는 명절 음식이다. 염소 판매장에 길게 늘어선 줄은 물론 사온 염소를 오토바이 뒤에서 꼭 끌어안고 가는 사람들, 목줄을 메어 걸려가는 사람들, 길가에 목이 메어 쉬고 있는 염소 등 다양한 진풍경이 벌어진다. 백치미를 자랑하는 염소는 자신의 앞날은 예감하지도 못한채 얌전하다. 우리도 명절이 되면 제사상 장바구니 가격이 뉴스가 되듯 더 샤인 즈음에는 염소 값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작년보다 비싸졌다느니 수급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류이다. 평균적으로 55천마리 이상의 염소가 이 기간에 소비된다고 하니 가격이 요동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한국에는 닭 최대 위기 복날이 있다면 네팔에는 염소 최대위기 더 샤인이 있다.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된 네팔이지만 명절에 고향에 가서 가족들과 염소고기를 나눠먹는 전통은 여전하다. 코로나19 1일 확진자가 5천명씩 나오는 요즘이지만 모두가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나는 더샤인 연휴 전날에 직원들이 퇴근하며 보인 설레는 미소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연이 하늘을 높이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연 잡이가 줄 끝을 꼭 잡고 있어서라고 하던가. 이들이 가진 확고부동한 뿌리가 문득 부러워지면서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명절에 여행보다는 가족과 빈둥거리는 시간을 보내야지 하는 다짐을 새삼 해본다.


2015년 대지진의 여진은 현재도 진행 중

2015년 네팔 대지진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탓에 지인들은 곧잘 지진은 괜찮으냐고 묻고는 한다. 나의 대답은 항상 언제 적 이야기냐며 지금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여진이 지금도 계속된다. 생활 필수 어플이 된 ‘지진 알람계‘에 따르면 내가 느끼던 아니던 지금도 크고 작은 지진들이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고 현지에서는 모두 2015년의 여진이라고 한다.


오늘 새벽 쾌 오랜만에 지진을 느끼면서 깨어났다. 보통은 5~10초 내의 짧은 지진이 대부분인데 침대 흔들림으로 깨어났으니 꽤 긴 기간 흔들렸으리라. 베개를 머리에 이고 뛰쳐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 잠잠해졌다. 살그머니 지진 어플을 켜보니 5시19분경 집과 불과 350km 떨어진 Kodari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집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집밖에는 개들이 평안하게 누워있으며 새벽 시장을 다녀오는 사람들의 이동도 평범한지라 나는 안심(?)하고 평범한 하루를 시작했다. 흔히 영화에서는 대재앙을 앞두고 동물들이 먼저 탈출하여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곤 한다. 과학적으로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던 지금까지 찰떡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렇게 매일 시끄럽던 개와 새들은 그 새벽 조용했다는 것.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무던했던 것은 아니다. 카트만두 생활을 시작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찾아온 첫 지진 때는 출근준비하다 말고 머리카락의 물을 떨구며 쿠션과 핸드폰을 쥔 채 3층 집에서 1층으로 뛰어 나갔다.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웃으며 ‘It’s OK’를 외치던 사람들이 이상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 나도 그렇다. 그동안 출근준비를 하다가, 샤워를 하다가, 책을 보다가 지진을 감지하는 일이 잦아졌고 걱정은 하지만 이제 호들갑은 없이 조용히 사태를 주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불어 재해 배낭을 만들어 현관 앞에 두고 살게 되었다. 첫 경험 때 핸드폰만 달랑 들고 나간 나의 미숙함을 아찔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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