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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Jul 11. 2024

인연

영화 <Past Lives>를 보고


어떤 예술작품이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걸 본다.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애틋한 사랑이야기일 수 있다. 열두 살 때의 첫사랑을 잊지 못한 해성이 이십여 년이 흐른 뒤 나영을 찾아가는 이야기, 첫사랑의 아름다움과 향수가 자아내는 매혹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삼십 대의 노라가 열두 살의 나영을 만나고 떠나보내는 이야기, 혹은 열두 살의 어린 해성이 삼십 대의 어른 해성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로.


어떻게 영화를 감상하든 여기에는 시간과 변화와 관계가 있다. 주인공은 해성과 나영이 아니라 어쩌면 이 셋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흐르고, 그 사이 나는 변하고, 그러면서 너와의 관계도 변한다.  


나영은 이민 간 캐나다에서 노라라는 새 정체성을 갖추고 야심 차게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한국에 남은 해성도 역시 자기 길을 걸어간다. 해성은 왠지 주춤거리는 느낌이다. 자꾸만 나영을 생각하고 과거를 돌아본다. 끝내 해성은 이십여 년이 지나 뉴욕으로 나영을 찾아가는데, 나영은 노라가 되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영의 곁에는 '해성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좋은 사람임을 확인한' 남편이 있다.


나영은 해성을 만나 흔들린다. 그가 불러들이는 과거의 시간이 발산하는 매혹적 자력은 거부할 수 없게 강력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일과 저 앞에 빛나는 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극 중 나영은 남편에게 인연과 전생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전생이란 것이 있어서, 두 사람이 만나려면 팔천 겹의 인연이 모여야 하는 거라고. 시나리오를 쓴 감독 셀린 송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셀린 송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을 전생과 인연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감싸 안았던가 싶다.


첫사랑의 남자가 아름다운 과거의 시간으로 내 앞에 서 있을 때.

첫사랑의 여자가 눈부신 어린 시간으로 내 앞에 서 있을 때.

내가 걸어갈 길에서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로 되걸어가고 싶을 때.

도저히 앞으로 발걸음을 떼지 못할 것 같을 때, 그러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영화가 함의하는 것이 이런 것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자리에 한없이 머물러도 좋겠다. 아니면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왔던 길로 되돌아 달려가 과거의 첫사랑과 순수했던 어린 나와 청량한 어린 시간을 두 팔로 껴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껴안을 수 없다. 그것은 구체적 형체를 잃었으므로. 시간이란 그저 길이고, 그 길은 되돌아 밟을 수 없는 그런 성질이므로.


그렇다고 그때의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았던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해성: 우리가 같이 자랐더라도 내가 널 찾았을까, 우리가 사귀었을까, 헤어졌을까, 부부가 됐을까,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을까.  
        근데 이번에 와서 확인한 사실은 넌 너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내가 널 좋아한 이유는 네가 너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넌 누구냐 하면 떠나는 사람인 거야.

나영: 너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해성: 알아.

나영: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너 앞에 앉아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이십 년 전에 난 그 아이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해성: 그리고 그때 난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그 애를 사랑했었어.

나영: 또라이네.

(둘이 웃는다.)


심리적 실재라는 게 있다. 우리가 자란 옛날 집이나 동네를 어른이 되어 찾아갔는데 그 집과 그 동네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때, 처음으로 드는 감정은 허망함 같은 것일 테다. 통째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심정이랄까. 하지만 그 집과 그 동네, 골목길과 작은 슈퍼, 동그란 언덕과 냇물,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존재한다. 존재의 자리가 다를 뿐. 그곳은 오롯한 내 마음 속이다. 그때의 삶은 한때 존재했고, 지금도 마음에 존재한다. 낡은 사진 한 장은 그 순간이 현실적으로도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적 같은 증표라고 하면 어떨까.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길이니까. 그 길은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길이니까. 과거의 자력이 물리칠 수 없이 강할지라도 우리의 몸과 우리의 발과 우리의 마음은 현실의 이 시간을 디디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과거의 아름답고 풋풋했던 시간도 마음속에서 잘 존재할 테니까.  


결국은-

해성처럼 현명해져야 하는 거다.

"이번에 와서 확인한 사실은, 넌 너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넌 누구냐면, 떠나는 사람인 거야.

(But the truth I learned here is, you had to leave because you're you... and who you are is someone who leaves.)"


결국은-

나영처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거다.

"너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 나영이는 과거에 두고 왔고, 그렇지만 여전히 과거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Letting go라는 영어 표현은 우리가 뭔가를 포기하지 못할 때 쓰이는 말인데, 생각할 수록 이 말은 무척 적절하다. 가게 해줘. 보내줘. 붙잡고 있는 건 '나'이고 어쩌면 저쪽에서는 떠나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어? 하고 달래는 것만 같다. '나'를 생각하지 말고 저쪽을 생각해주라는 듯이. 해성을, 나영을, 과거의 시간을, 과거의 일들을,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Let Go! 해야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듯이.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성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영은 노라가 되어 남편의 품에 안겨 깊이 운다. 떠나보내는 건 어쨌든 너무나 슬픈 일이므로.


생각해보면 실은 우리도 나영처럼 ‘떠나는 사람’이고 해성처럼 ‘보내주는 사람’으로 수천 겹의 생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변화와 관계를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수천 번의 생을 보냈는지도.



 https://www.youtube.com/watch?v=WJTnve_kdu0



*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감독 셀린 송의 대담에서 감독은 해성과 나영의 심리적 시간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해성은 어린시절 못 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뉴욕에 왔고, 나영은 어린 자신을 떠나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성이 스토리에 있어서 나영을 앞서고 있는 상태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해성이 찾아옴으로써 두 사람은 비로소 작별할 시간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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