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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ug 29. 2024

시를 읽기 전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기 전에 소네트라는 시 형식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문학 형식이 다른 글은 담장이 있습니다. 거인의 정원으로 들어가려면 이 담장을 넘어야 하겠지요. 경쾌하게 훌쩍 뛰어넘어 들어갈 수 있다면 더없이 즐겁겠고, 크고 아름다운 정문이나 소박하고 친근한 뒷문을 찾아 들어가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거인의 정원을 두르고 있는 담장을 따라 걸으며 담장과 친해져야겠습니다.       

     

우선, 소네트는 정형시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조, 일본의 하이쿠, 중국의 한시도 정형시입니다. 정해진 형식에 맞춰 쓰는 시인 것이지요. 소네트는 엄격한 운율과 특정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소네트의 운율은 abab cdcd efef gg라고 설명되는데, 좀 어리둥절합니다. abab cdcd...가 뭘까요. 피천득 문학 전집 제5권 <번역집 셰익스피어 소네트>에서 정정호 책임편집자가 소네트 73번을 구체적 사례로 들어서 이 부분을 쉽게 설명해 줍니다.

       

   1. That time of year thou mayst in me behold,(a)

   2. When yellow leaves, or none, or few, do hang(b)

   3. Upon those boughs which shake against the cold,(a)

   4. Bare ruined choirs, 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b)

   5. In me thou seest the twilights of such days,(c)

   6. As after sunset fadeth in the west,(d)

   7. Which by and by black night doth take away,(c)

   8. Death’s second self, that seals up all in rest,(d)

   9. In me thou seest the glowing of such fire,(e)

   10. That on the ashes of his youth doth lie,(f)

   11. As the death-bed whereon it must expire,(e)

   12. Consumed with that which it was nourished by.(f)

        13. This thou perceiv’st, which makes thy love more strong,(g)

        14. To love that well which thou must leave ere long.(g)          


1~4행의 마지막 낱말들은 소리가 비슷합니다. 즉, 1행의 behold와 3행의 cold는 /비홀드/와 /콜드/, 2행의 hang과 4행의 sang은 /행/과 /쌩/으로, 말소리의 일부분이 동일하지요. 5행과 7행, 6행과 8행도 동일한 소리를 가진 낱말들을 행 끝에 쌍으로 배치하고 9행과 11행, 10행과 12행도 마찬가지입니다. 13행과 14행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같은 소리(운)를 가진 낱말들을 규칙적으로 행의 끝에 배치하는 걸 일컬어서 각운이라고 합니다. abab cdcd efef gg는 이와 같은 소네트의 각운 규칙, 즉 운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시를 번역할 때 이러한 운율까지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어와 한국어는 매우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의 운율을 그대로 반영하기는 아주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편, 영어에는 강세가 있고 소네트는 강세와 관련해서 약강 5보격이라는 규칙이 적용됩니다. 약강 5보격이란, 강세가 있는 음절 5개와 강세가 없는 음절 5개가 한 행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1행에서 that은 강세가 없고 time은 강세가 있으며 behold는 -hold에 강세가 있습니다. 한국어는 강세가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번역시에서 이 규칙은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소네트의 구조는 14행으로 구성됩니다. 73번 시도 14행이지요. 이 구조는 시상의 전개와 관계가 됩니다. 즉, 열네 개 행 안에서 기승전결로 시상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죠. 1~4행은 기, 5~8행은 승, 9~12행은 전, 13~14행은 결에 해당합니다. 특히 13행과 14행은 앞서 전개된 내용에 대한 정리와 결론 혹은 반전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좋겠습니다. 73번의 번역시로 이 구조를 알아볼까요:

     

1. 그대 나에게서 늦은 계절을 보리라,

2. 누런 잎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이

3. 삭풍에 떠는 나뭇가지

4. 고운 새들이 노래하던 이 폐허된 성가대석을

5. 나에게서 그대 석양이 서천에

6. 이미 넘어간 그런 황혼을 보리라,

7. 모든 것을 안식 속에 담을 제2의 죽음,

8.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9. 그대는 나에게서 이런 불빛을 보리라.

10. 청춘이 탄 재, 임종의 침대 위에

11. 불을 붙게 한 연료에 소진되어

12. 꺼져야만 할 불빛을.

   13. 그대 이것을 보면 안타까워져

   14. 오래지 않아 두고 갈 것을 더욱더 사랑하리라. (피천득 옮김)     


이 시의 시상 전개에 대해 정정호 편집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소네트에서 3가지 이미지(심상) ‘늦은 계절’, “밤‘, ”꺼져야만 할 불빛’을 통해 나이 들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사랑은 오히려 강화됨을 보여준다. 1~4행은 한 해의 마지막 계절과 같은 시인의 삶과 생기 넘치는 여름이 지나간 뒤 앙상한 가지의 무기력함을 비교하고, 5~8행은 끝나가는 시인의 삶을 죽음과도 같은 하루의 종말인 밤과 비교한다. 9~12행은 시인의 삶을 결국 소진되어 없어질 불꽃과 비교하고 마지막 13~14행은 임박한 상실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이 다시 살아남을 것을 노래한다. 마지막 결론에서 새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암담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던 중 어차피 모든 것을 두고 죽어야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더욱더 사랑하겠다는 낙관적인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Pp.354-356.     


이처럼 엄격하게 정해진 운율과 14행의 구성 속에서 시상을 전개하려면 압축되고 정제된 표현을 구사할 수 있는 고도의 언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언어로 이루어진 최상의 예술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소네트의 기원은 중세 이탈리아이고 이탈리아식, 스펜서식, 잉글랜드식 소네트의 세 양식이 있다는 등등의 설명은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는 데 크게 중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소네트가 내용에 있어서 궁정 연애 관습 안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과 남성의 고뇌를 다루는 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그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소네트의 관습화된 내용과 언어 장치들을 새롭게 실험했다고 하는데, 소네트에 등장시키는 인물들도 그에 해당됩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모두 154편으로서 내용이 느슨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연작시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미모의 귀족인 젊은이와 검은 여인 그리고 시인 자신입니다(번역자에 따라서는, 시인과 대항적 관계에 있는 또 한 명의 시인이 있다고도 합니다.) 미남 청년은 시인이 아끼는 사람(연인)이고 검은 부인은 유혹적인 요부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미남 청년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청년은 시인의 마음을 배신하고 검은 여인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소네트에 등장하는 시인은 대체로 셰익스피어 자신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렇다면 청년과 검은 여인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많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세 인물 혹은 네 인물이 실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액면 그대로 읽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이해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박우수 번역자에 따르면, 여성을 지고한 위치로 높이는 소네트의 관습은 ‘여성을 소유하려는 지배 계급 남성들의 전략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입니다. 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역시 ‘인물들의 극적 관계는 셰익스피어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지적 유희의 산물’이고 ‘일종의 언어 게임’이며 ‘기지에 찬 상상력이 만들어낸 언어의 잔치’입니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그저 시인이 상상해 낸 산물이란 것이죠:


1천 개의 마음을 가진 셰익스피어는 소네트라는 시적 형식을 사랑에 빠진 인간들의 욕망의 지도와 감각의 잔칫상을 그려 내는 도구로 사용했을 따름이다. 그는 시의 화자와 젊은 후견인 내지 연인, 그리고 검은 여인의 삼각 관계뿐만 아니라 시의 일반적인 주제들, 가령 시간의 파괴성이나 시의 영속성, 동시대 시인들과 자신의 시의 차이점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154개의 소네트라는 자재를 이용해 지적 건축물로 구축해 냈다. 시의 화자나 젊은이, 검은 피부의 여인은 하나같이 어떠한 위치에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변화무쌍한 인물들이며, 이 점이야말로 그들이 다름 아닌 시인의 상상의 산물임을 알려주는 지표다. <소네트집>, Pp.170-171.


셰익스피어는 봉건 귀족이라는 신분에 대해서도 '썩어가는 백합은 잡초보다 더한 악취를 풍깁니다(94번 14행)'라는 표현으로 은밀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박우수 번역자는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가 소네트를 쓴 시대적 배경도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합니다. 박우수 번역자에 따르면, 소네트 연작은 1592년에서 1594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쓰였고 이때는 흑사병으로 극장이 문을 닫아 연극 상연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공백이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소네트를 낳게 한 것이지요. 아무튼 16세기 후반에 유럽에는 소네트 열풍이 불었고 셰익스피어도 그에 따라 소네트 154편을 썼습니다. 그가 작품을 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는 르네상스가 꽃피고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근대 계몽주의로 이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시대적으로 큰 전환기였고 따라서 정신적 변화의 에너지가 폭발하던 때였지요. 부분적으로는 시대가 천재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열어주고 추동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변화의 시대였기에 나올 수 있었던 천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언어적으로만 따지자면, 그 시대는 현대 초기 영어 형성의 이행기(정정식 편집자)였습니다.      


영어 화자도 셰익스피어는 읽기 어려울 겁니다. 언어도 사람처럼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소멸하기 때문에 500년 전의 영어는 현대 영어와 매우 다르고 시대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시대의 인물이고, 우리는 긴 시간의 간극을 두고 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 시대와 이 시대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있지요.  


비영어권 일반 독자로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원어가 아닌 우리말로 읽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반투명한 피막을 통해 시인과 소통하는 일이어서, 16-17세기 당시의 영어화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으며 느꼈을 생생한 감정적, 지적 흥분을 우리는 절대 느낄 수 없을 거예요. 이것은 문학 번역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시를 읽는 까닭은 문학이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가 500년의 시간을 이겨내고 현재에도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모순적으로 언어를 뛰어넘어야 잡을 수 있는 어떤 ‘뜻’이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우리는 문학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뜻'은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실에 대한 풍문이자 먼 북소리일지 모릅니다.


'아름답고, 친절하고, 진실함'은
내 주제의 전부니라,
-소네트 105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빠르게 일독해 보니 몇몇 시를 빼놓고는 별 감동을 느낄 수 없었고 심지어 무의미한 말로 들려서, 약간의 지식으로 눈을 밝힐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제 조금은 밝아진 눈으로 다시 시를 찬찬히 읽어보기로 합니다. 전체 154편의 시 중에서 몇 편만 선별해보려는데, 여전히 많은 시들이 그저 무미하고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는 느낌이 오네요. 그래서 저의 타협안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읽는 겁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마음의 귀만 열어놓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시의 물길이 가슴으로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경계를 돌아 흘러가면 굳이 붙잡지 말고 흘려보내시기를.



제가 참고하는 번역 시집은 다음 네 권이며, 소네트에 대한 설명도 이 네 권의 번역서에 딸린 작품해설에서 가져온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 신정옥 번역, <소네트>, 전예원, 2011.

* 박우수 번역, <소네트집>, 열린책들, 2011.

* 이상섭 번역, <셰익스피어 전집>, 문학과 지성사, 2016/2022.

* 피천득 번역, <셰익스피어 소네트>, 범우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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