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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너의 자리에

by 스프링버드


샐리,


넌,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어제와 그제는? 또 내일은 어떤 하루를 맞이하게 될까? 난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마음이 흔들리는 걸 경험해. 누가 지나가며 슬쩍 던진 말 한마디의 의미를 추측하며 마음이 산만해지고, 내가 거칠게 뱉어버린 말 한마디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며, 갑자기 떠오른 미래 계획에 골몰하느라 전철 정거장을 놓치기 일쑤고, 영화의 한 장면 노래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몽상에 빠져들곤 해. 또 그게 아니면, 유튜브를 틀어놓고 끝없는 수다를 듣는다거나 (귀가 먹먹해지고 머릿속에 소음이 가득 찰 때까지) 남의 집의 귀엽고 우스운 개를 보다가 문득 내 옆에 몸을 붙인 채 엎드려 있는 우리 집의 작은 개에게 미안해질 때도 많지. 요컨대 내 마음은 둥둥 떠돌아, 과거와 미래의 있지도 않은 시간 속을, 저 밖에 있지도 않은 추측과 억측과 상상의 세상 속을. 그럴 때면 생각해. 아, 고요히 있고 싶다, 돌처럼 가만히.



브렌던 웬젤 글과 그림, 황유진 옮김, 북뱅크, 2022.



표지를 넘기고 제일 먼저 보이는 첫 그림은 새벽이야. 안개가 채 거두어지지 않은 새벽. 그리고 희뿌연한 옅은 대기 속에 회색 바위 하나가 보여. 달팽이가 조용히 바위 위를 기어가네. 꼬불꼬불한 흔적을 남기면서. 아주 고요한 시간이야.


돌 하나가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물과 풀과 흙과 함께
원래 모습 그대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돌은 그대로인데 주변 상황은 변해. 다람쥐가 도토리를 까먹는 늦은 오후면 돌은 검은색이 되고, 은색 달빛이 환하게 비칠 때면 희게 빛나. 에쿠, 갈매기가 와장창 알을 떨어뜨릴 때도 있고, 뱀이 따뜻하게 몸을 데울 때면 사방이 조용하지. 누구는 돌을 거칠다고 느끼고 누구는 돌이 부드럽대. 여름에 돌은 초록에 감싸였다가 시간이 흐르면 빨간 낙엽을 한가득 얹기도 하지. 하늘이 보랏빛일 땐 보라가 되고, 파랄 땐 파랑이 돼. 덩치 큰 동물은 돌을 작은 돌멩이라고 하는데 조그만 곤충은 넘을 수없는 거대한 언덕이라고 해. 누구는 손으로 돌의 감촉을 느끼고, 누구는 코로 돌의 정체를 탐색해. 돌 위에서 신나게 잔치를 벌이는 동물도 있고, 우뚝하게 앉아서 자기를 왕이라 우기는 동물도 있어.







하늘을 나는 철새는 돌을 표지 삼아 방향을 잡고, 작은 개미는 돌 위에 지도를 그려놓아. 맹수는 돌 뒤에 숨고 사냥감도 돌 뒤에 숨어. 돌은 둘 다 숨겨줘. 돌을 보며 한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가 있고, 돌 위에서 그걸 노래로 풀어내는 이도 있어. 돌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 한 순간도, 긴 세월도, 섬도, 파도도, 기억도, 영원도, 그 모두.


그런 곳을 들어 본 적 있나요?
물과 풀과 흙과 함께
돌 하나가 가만히 앉아 있는 곳을.





가만히 있는 건 돌뿐일까? 아니, 여기 등대도 있어.


소피 블랙올 글과 그림, 정회성 옮김, 비룡소, 2019.



샐리는 등대를 본 적 있니? 우리나라의 동해에 가면 쉽게 등대를 만날 수 있어. 부두에는 으레 귀엽고 작은 등대들이 있지. 대개는 지붕이 빨갛고 몸채는 하얘. 지금은 전구로 빛을 내지만 옛날에는 그곳에 사람이 직접 머물면서 석유램프로 불을 밝혔다고 하네. 이 그림책은 옛날의 등대지기에 관한 이야기야.


바다 끝자락에 솟은 자그마한 바위섬.
가장 높은 곳에 등대가 우뚝 서 있어요.
등대는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굳고 단단하게 지어졌지요.
바다 멀리 불빛을 밝게 비추어
배들이 길을 잃지 않게 안내해요.
등대는 해 질 녘부터 새벽녘까지 불을 밝혀요.
여기예요... 여기예요... 여기예요! 여기 등대가 있어요!





등대지기는 외로울까?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등대지기는 할 일이 많아서 평소에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별로 없어. 평범한 하루의 일과는 꽉 짜여있지. 연료 통에 석유를 채우고, 등대 렌즈를 닦고, 램프 심지를 다듬고, 램프가 빙빙 돌아가게 태엽을 감고, 업무 일지를 적어야 해. 가끔은 태풍이 불거나 안개가 짙게 끼거나 한밤중에 배가 난파되는 사고가 날 때도 있어. 그럴 땐 노를 저어 가서 선원들을 구조하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도 해야 하지. 마치 모험가처럼 말이야.


등대 일과 상관없이 등대지기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차를 마시고 바느질을 하고 바람 소리를 듣기도 해. 육지에서의 생활과 별다르지 않지? 일과 생활이 나뉜 듯, 합쳐진 듯, 돌아가던 어느 날 문득 등대지기는 "곁에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내가 등대로 이사를 왔지.






지금 시대는 등대지기가 필요치 않아. 전기가 석유램프를 대신하면서 등대지기는 없어진 직업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등대지기는 아내와 아기와 함께 등대를 떠났는데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어. 바닷가 끝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서 창 밖으로 계속 등대를 보며 살아. 등대는 등대지기에게 오랜 친구니까.


일렁이는 파도너머, 저 멀리 땅 끝자락에서 불빛 하나가 빛나고 있어요.
안녕! ... 안녕! ... 안녕!
안녕, 나의 등대야!



돌 하나와 등대는 참 많이 닮았어. 가만히 있다는 점에서. 가만히 있는 돌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 수많은 변화가. 돌은 가만히 있는데 여러 존재들이 돌을 쓰다듬고 냄새 맡고 기대고 기어가. 계절이 변하고 밤낮이 돌아가도 돌은 가만히, 그저 가만히 있어. 고요하게.


등대는 어두운 밤과 짙은 안개와 거친 비바람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불을 비추며 "여기 등대가 있어요!" 하고 외쳐.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고 튼튼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지. 그 안에서 등대지기는 등대 불을 밝게 밝히며 자신의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겉으로는 등대지기가 등대를 보살피는 것처럼 보이지만 등대지기도 등대에게서 보살핌을 받지. 바람과 파도로부터 말이야. 등대는 가만히, 그저 가만히 있어. 고요하게.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지루한 일을 하든 흥미로운 일을 하든, 기분 좋은 사람을 만나든 고약한 사람을 만나든, 돌처럼 가만히, 등대처럼 가만히, 가끔은 그렇게 가만히 있어봐도 좋겠어. 그저 고요히, 하루 단 몇 분만이라도 돌처럼 등대처럼 가만히 있어봐도 좋겠어. 인간은 이족보행하는 움직이는 동물이고 세상은 우리더러 능동적이 돼라, 적극적이 되라고 말하지만, 가끔은 하루에 단 몇 분만, 돌처럼 등대처럼 가만히 있어봐도 좋을 것 같아. 아주 수동적으로. 그러고 있으면 우리도 잠시 돌과 등대처럼 믿음직하고 변치 않는 존재가 되어 고요하게 머물 수 있지 않을까.



* 인용한 그림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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