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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Apr 10. 2022

여행을 빠르고 쉽게 망쳐봅시다

남의 기분을 망치려고 작정한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대개 몇 마디 섞어보면 벌써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는데 하필 여행 중에 마주치면 꽤 곤란하다. 최악의 경우 그곳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남는다는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 있을 때였다. 아타카마 사막을 탐험하기 위한 베이스캠프 같은 곳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길이가 긴 칠레의 북쪽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온 마을이 식당과 숙소와 ATM과 투어 회사, 딱 네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는 그런 곳. 국경지대인 데다가 사막이라는 고립된 지형의 특성상 여유 있기 쉴만한 곳은 아니기에 원하는 투어를 계획하고 딱 필요한 칠레 페소를 인출해 털고 볼리비아로 떠나는 곳이다.


느긋하게 우유니로 떠나는 투어 날짜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숙소 그늘의 해먹에 누워있던 어느 날, 손님이라곤 나와 내 친구뿐이던 호스텔 입구가 초저녁부터 요란스러웠다. 딱 봐도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게 장기여행 느낌이 팍 나는 한국인 네 명이 온 거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신가?”


보아하니 방금 볼리비아에서 국경을 넘어온 것 같았다. 나의 다음 목적지였기 때문에 정보도 얻을 겸 자연스레 서로의 모험담을 나누었다. 무리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남자는 에콰도르 이민자 출신으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것을 자랑스레 떠들어댔다. 그러다 나의 우유니 사막 투어 예약 티켓을 보더니 여행사의 소유 회사 이름, 차량, 가격, 중간 경유지 등등 내가 알 수도 없는 것들을 따지고 들었다. '우린 그거보다 더 싸게 했는데' 라는 말이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소금 사막을 본다는 기대에 부푼 여행자 대신 사기를 당한 멍청이만 남았다. 


대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건지. 어딘가에 '남의 여행을 빠르고 쉽게 망쳐봅시다'라는 필독서가 있는 걸까. 아직까지도 나는 아타카마 하면 그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라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런가 하면 태생이 사기꾼인 놈들도 있다. 이집트에 있을 때다. 룩소르 역에서 선뜻 오토바이를 태워주던 한 남자는 처음엔 어느 숙소의 아들, 그다음엔 그 동네 레스토랑 주인의 조카, 또는 과일가게 사장의 친구, 만날 때마다 신분이 바뀌었다. 말이야 어쨌든 간에 그 더운 사막도시에서 오토바이를 공짜로 탄 인연으로 그에게서 이런저런 관광지 입장권을 구매했지만 역시나. 실제 매표소 가격의 두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신기한 건 이런 류의 인간들은 다음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일인처럼. 너 나한테 표값으로 사기 치지 않았냐고 따지면 쓸데없는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내가 임마 응? 니 오토바이도 태워주고 으이? 내 친구 아빠가 하는 숙소도 소개해주고 으이? 우체국도 어딘 지 알려주고 임마 으이? 


뭐 이런 느낌이다. 사실 금액보다는 기분의 문제다. 기원전 1400년 전에 세워졌다는 룩소르 신전에서 받은 감동보다 이 말도 안되는 대화가 기억속에 더 깊이 각인되려는 순간이다. 다행스럽게 이번엔 구원자가 나타났다. 당장 이 불쾌한 도시를 벗어나려 버스를 타러 가는 내 곁을 숙소에서 일하던 10대 소년이 따라나섰다. 한동안 별 말없이 나란히 걷기만 하던 소년은 버스 터미널이 가까워지자 긴 여정이 될 것이니 빵이 맛있는 곳, 과일이 싼 곳 등을 알려주며 먼길이니 미리 준비할 것을 권했다. 플랫폼에 도착한 뒤, 소년의 친절이 고마워 남아있던 이집트 돈을 쥐어 주려 하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내가 일하는 속소에 머물던 손님이 웃으면서 떠났으면 좋겠어"


순간 부끄러워진 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팁 대신 소년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밝게 웃으며 버스가 멀찍이 떠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소년. 소년의 손에 이끌려 샀던 복숭아를 한 입 입안으로 밀어 넣자 잔뜩 긴장했던 가슴이 녹아내렸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던, 고대 이집트 신전의 감동이 밀려오는 맛이었을 거다. 그러고보면 길을 떠난 사람에게는 필요한 순간에 다른 여행자의 기분을 바꿀 능력이 있는건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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